김 경 호(79~82년 학생기자)

군부독재정권 시절이던 1980년대 당시엔 제주대신문에선 학우들이 목마르게 갈구하던 통렬한 사회 비판과 감시기능이 담긴 신문을 만들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었다. 주간교수의 철저한 감시와 레이더망 같은 사전검열제도는 우리의 목을 죄는 것 같았기에 신문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매번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제주대신문에선 봄이란 단어와 자유, 민주화라는 용어조차 발견 할 수 없을 정도로 보도통제가 심했기에 신문을 제작하는 단계에서 매번 가위질 당하는 아픔 때문에 쓴 소줏잔을 들고서 울분을 터트리던 일들이 너무 많았다. 결국 참다못한 우리가 1982년 1월 어느 날, 뜻이 맞는 동료기자들과 의기투합을 해서 한 가지 사건을 저질렀던 일이 지금껏 잊지 못할 에피소드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그동안 제주대신문에선 금기시 했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내용이 가득 담긴 소식지를 제작해서 학내외에 배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기자들이 소신껏 쓴 원고를 취합한 뒤에 활자판이 아닌 내가 직접 손으로 옮겨 써서 마스터 인쇄기로 찍어낸 12쪽 짜리 ‘외길’이란 유인물을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제주대신문사 기자들이 쓴 글이었기에 일종의 제2의 제주대신문이면서 호외판인 셈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일까? 학우들에게 배포되기 직전에 학교 측에 의해서 발각되고 말았다. 결국 그 유인물 제작에 관여했던 나를 비롯한 동료기자들은 불법유인물을 제작한 혐의로 체포될 것이라는 다급한 전화연락을 받고서 우리는 간사선생님 집에 급히 몸을 숨기고 밤새도록 상황을 지켜보게 되었다. 물론 배포되기 직전에 발각이 되었기에 전량 몰수되었고, 총장 지시로 모두 소각장에서 불태워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 유인물을 제작했던 증거물은 사라져 버렸다. 당시 경찰에서는 유인물 제작과 관련된 정보를 입수한 상황이었지만, 어쨌든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물이 사라졌기에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요즘 시대엔 도무지 이해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우리는 그처럼 암울한 시기에 대학을 다녔고, 그 당시 제주대신문은 그런 억압된 상황에서 만들어졌던 셈이다.

하지만 36년이 지난 지금도 나의 낡은 스크랩북에는 ‘외길’ 한 부가 남아 있다. 어쩌면 소각된 2000부 가운데 유일하게 한 부가 남아서 지금껏 생존한 셈이다. 혹시 그 당시 동료기자들도 스릴이 담긴 에피소드와 추억이 담긴 이 ‘외길’을 나처럼 빼돌려서 보관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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