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동 주 (75~77년 학생기자)

1976년, 내가 편집장을 맡았던 42년 전에는 제대신문을 인쇄소에서 찍었다. ‘평판인쇄’라 해서 신문반절 4면을 하나하나 조판한 뒤 다시 한 면씩 4번을 찍어야 겨우 4면짜리 신문 한 장이 인쇄되는 방식이었다. 이러니 4면짜리 신문 한 장을 찍어내려면 짧게는 10일, 길면 보름을 넘기기가 다반사였다.

재임기간에 월간 발행을 정착시키고 2-3년 안에 월 2회 발간을 이루고 말리라는 목표를 세웠던 나로서는 답답하고 조바심 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창간호부터 계속 신문을 찍어온 대학선배가 운영하는 인쇄소를 마냥 닥달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한 학기에 6번 신문을 발행하고 나니 내 학점은 평균 C로 학과에서 꼴치 수준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인쇄소에 계속 매달려 있다 보니 강의는 절반을 겨우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을 찍었던 <한일인쇄사>는 제대신문을 20년 이상 인쇄해 왔을 뿐 아니라 논문집 등 제주대의 인쇄물 발간을 거의 독점할 정도로 대학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신문을 만들면서 거의 날마다 인쇄소를 들락거렸기 때문에 인쇄소 식구와 대학신문 기자들은 미운 정 고운 정 모두 들어 간단히 결별을 선언할 입장이 아니었다.

주간교수도 신문사 인쇄를 반대하지는 않았지만 인쇄소와의 계약해지를 먼저 꺼내기는 입장이 난처하다며 한 발 뒤로 빼는 지경이었다.  제주속담에 ‘짐진 사름이 팡을 먼저 찾는다(짐을 지고 있는 사람이 짐을 부리고 쉴 데를 먼저 찾는다)’는 말이 있다.

모두들 나서길 꺼려했지만 가장 답답한 것은 나였다. 1977년 1월 어느날 나는 인쇄사 차주홍 사장을 찾아가 술을 한잔 사주실 것을 청했다. 술이 몇 순배 돌고나서 내 애로사항을 토로했다. 신문 제작에 시일이 너무 소요된다. 내 학업이 엉망이다. 신문도 격주간 발행을 꿈꿀 수 없다. 등등.

내 얘기를 한참 듣고 있던 차사장이 말문을 열었다. 당신 말이 모두 맞다. 아쉽기는 하지만 신문사 인쇄를 반대하지 않는다. 당장 계약해지 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 예상보다 흔쾌히 제대신문의 입장을 이해해 주었다. 1977년 2월 제대신문 152호는 이렇게 제주신문사에서 인쇄됐다.

언론의 발전에서 기술의 발전은 중요한 조건이다. 제대신문의 오늘의 발전에 신문사 인쇄의 의미는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제대신문 152호의 지형(평판 활판을 윤전기용 원형 활판으로 제작하기 위한 종이틀)을 영구 보존하기 위해 제대신문사에 보관했다. 42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대학신문사에 이 지형이 보관돼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지금도 보관돼 있다면 제대신문 성장과정의 한 증거물로 계속 보존해주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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