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과 접촉기회 줄어들어 회피의 대상이었던 제주도
백성들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 있던 땅

2월 13일 벤처마루 10층에서 이영권 제주역사연구소장이 강연을 하고 있다.

제주주민자치연대(대표 강호진)가 주최하고 제주청년협동조합(이사장 박건도)이 주관하는 ‘2030청년들과 함께하는 제주를 제주답開’ 강좌가 제주시 벤처마루 세미나실에서 개최됐다.

이 강좌는 제주도의 전문가들과 청년들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 ‘환경’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마련됐다.

세미나는 매주 총 8강에 걸쳐 이영권 제주역사교육연구소장의 ‘제주에 온 조선의 양반들’, 김정순 곶자왈 사람들 대표의 ‘곶자왈 제대로 알기’, 서영표 제주대 사회학과 교수의 ‘경제학적 합리성과 생태적 지속가능성: 공존 가능한가?’의 주제 등으로 진행된다.
2월 13일 열린 첫 강좌는 이영권 제주역사교육연구소장의 ‘제주에 온 조선의 양반들’이라는 주제로 시작됐다. 다음은 주요 강의를 요약했다.

◇조선의 양반들에게 제주도란

현재 국내 최고의 관광지를 제주도라고 한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도 그랬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중앙의 양반들에게 보인 제주의 모습은 야만의 땅이자 혼돈의 땅이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유배시절 벗에게 보내 편지에서 “이곳의 풍토와 인물은 아직 혼돈 상태가 깨쳐지지 않았으니, 그 우둔하고 무지함이 일본 북해도의 야만인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며 비하했다. 16세기에 유배 왔던 충암 김정 또한 “글을 아는 자가 매우 적고, 인심이 거칠고, 염치와 정의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했을 때 당시 양반들은 그저 교화가 덜 된 변방의 미개 지역정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의 양반들이 제주도를 꺼려했던 것은 빈약한 경제력이나 낙후된 문화 때문만은 아니다. 서울에서 가장 먼 제주에 간다는 것은 중앙정계와 접촉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며, 그에 따른 승진의 기회가 적었기에 이들에게는 회피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 내내 제주에는 중앙양반들의 왕래가 잦았다. 정부에서 지방관을 파견했기 때문이다. 제주도의 말과 해산물 등 제주의 특산물을 거두어 들여야만 했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전기 제주관련 내용은 말이 대다수다. 경국대전을 살펴보면 당시 말 한 마리의 가격은 노비3명 값이었다. 훌륭한 말일수록 경제적 가치는 더욱 높았다. 조선정부는 제주도를 싫어하는 양반들의 입장과는 무관하게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해 이들을 파견할 수 밖에 없었다.

지방관 외에도 제주도에 가야만 했던 조선의 양반들이 또 있었다. 권력 다툼의 결과로 밀려난 유배객들이었다. 유배형은 종신형이기에 제주도에서 최후를 맞아야 한다. 그러나 정국의 변화가 생기면 그들 역시 복권의 기회가 있었다. 그렇기에 다시 돌아갈 날만을 갈망했다. 이처럼 제주도는 유배객들에게도 달가운 땅이 될 수는 없었다.

◇제주에 온 지방관

조선시대 제주에 온 지방관은 우선 제주목사, 정의현감, 대정현감을 들 수 있다. 고려와 달리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폈던 조선은 건국 초부터 지방을 확고하게 장악한다. 전국을 8도로 나눠 각 도마다 지금의 도지사격인 관찰사(감사)를 뒀고, 그 밑으로 부, 목, 군, 현을 설치해 각각의 수령들을 파견했다.

조선시대 제주에는 3개의 행정구역이 있었다. 제주목은 제주도 북쪽 절반에 해당한다. 중심지는 현재의 제주시이며 관청은 관덕정 주변에 있었다. 정의현은 제주도 동남부에 위치하는데 중심지는 현재의 성읍민속마을이다. 대정현은 제주도 서남부에 있는 대정성이 중심지다.

그렇다면 이들 수령의 지위는 어느정도였을까? 당시 제주에는 정3품에 해당하는 목사와 종6품에 해당하는 현감이 파견된다. 목사는 본래 정3품 당하관에 해당하는 통훈대부(문관), 어모장군(무관)에 해당하는 당하관이 파견되는 것이 원칙이다. 정3품은 당상관과 당하관으로 나뉘는데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엄청나다. 당상관이라 하면 건물의 위에 올라와 임금과 함께 어전회의 참가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당하관은 건물의 아래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정3품의 통정대부(문관), 절충장군(무관)이상은 당상관으로, 같은 정3품의 통훈대부(문관), 어모장군(무관)이하는 당하관으로 구분했다. 같은 점3품이지만 결코 같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의 경우 특수한 사정 때문에 예외가 필요했다. 당시 제주도는 전라도 관찰사의 소속 아래 있었다. 육지와 떨어진 섬이었기에 전라도 관찰사가 제주도에 대해 본연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업무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위임했고, 그러다 보니 제주목사 자리에는 당상관이 파견됐다. 제주목사(정3품 당상관)가 관찰사(종2품)을 대신해 대정현과 정의현을 감독했던 것이다.

제주목사를 비롯한 수령의 임기는 30개월이었다. 하지만 임기를 채운 수령의 경우는 거의 없었다. 임진왜란 당시 발이 묶인 이경록 목사를 제외하고는 평균 재임기간이 1년 10개월에 불과했다.

◇유배의 섬 제주

제주지역의 연구들을 보면 약 200명의 유배객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시대에 유배인이라는 것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다. 정치범들이 대다수다. 그렇기 때문에 변방이면서도 항상 중앙 정계의 변화와 함께 움직인다는 점, 거물급 중앙정치인들이 왕래하며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을 본다면 당시 최대의 유배지라고 할 수 있다.

본격적으로 유배객이 몰린 것은 조선 후기부터다. 무의미한 당쟁이 계속되고 있을 때, 제주도는 권력에서 밀려난 정객들의 유배지로 각광을 받게 된다. 정적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가장 먼 제주도로 보내버린게 당시 조선의 현실이었다.

유배형은 죄의 경중에 따라 몇 가지로 나뉜다. 그 중 제주도는 먼 섬에 가둬버리는 ‘절도안치’, 집의 울타리 안으로만 행동반경을 제한한 ‘위리안치’, 혹은 ‘가극안치’의 경우가 대다수였다. 물론 이런 형을 받았다 해도 지방관에 따라서 울타리 밖을 나다니게 허락해주는 경우는 많았다. 정국 변화에 따라 이들 유배인들의 복권 가능성이 충분했기 때문이다. 중앙의 거물일수록 대접은 달랐다. 제주의 토호들은 연줄을 만들기 위해 유배객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소설가 현기영 선생은 순이 삼촌 ‘해룡이야기’에서 중앙의 양반들에게 냉대 받던 당시 제주도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육지 중앙정부가 돌보지 않던 머나먼 벽지, 귀향을 떠난 적객들이 수륙 이천리를 가며 천신만고 끝에 도착하던 유배지, 목민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국마를 살찌우는 목마에만 신경 썼던 육지 목사들, 가뭄이 들어 목장의 초지가 마르면 지체 없이 말을 몰아 백성의 일년 양식을 먹어치우게 하던 마정, 백성을 위한 행정은 없고 말을 위한 행정만있던 천더기의 땅, 저주받은 땅, 천영의 땅ㆍㆍ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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