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비판하는 기사 작성 상상할 수 없어
'봄이 와도 꽃이 피었다’ 적을 수 없는 현실 한탄

80년대 초반 학생기자 김경호씨의 모습

언론의 자유가 보장돼 사회를 낱낱이 파헤치고 자신이 쓰고 싶은 기사를 쓰는 지금과 달리 과거 모든 기사는 검열을 거쳤다. 기자들이 누군가의 입맛에 맞춘 기사를 작성하도록 억압받았던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는 군사독재정권 시절이었다. 당시 일반신문사뿐만 아니라 대학신문사도 기사의 자유는 없었고 부적절하다고 느껴지는 기사는 즉시 삭제됐다.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취재하고자 김경호(82년도 제주대신보 편집국장)씨를 만났다. <편집자 주>

그 시절의 제주대 신문은 제주 신보로 불리며 기사를 원고지에 작성해 제출하면 편집 부주간 선생님과 주간 교수님의 검열을 받았다. 만일 그 중 봄이 오다, 꽃이 피다, 독재, 민주화 등의 글이 담겨있다면 즉시 가위질을 당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라 지적당한 기사는 처음부터 원고지에 다시 작성해야 하거나 자신의 글이 사라지는 고충을 겪어야 했다. 학생 기자들은 학우들이 원하는 정보를 담은 기사가 아닌 학교의 입맛에 맞춰진 기사를 작성해야 했다.

검열에서 통과하지 못해 삭제됐던 만평.

김경호씨는 “79년부터 82년까지 제주대 신보에 학생기자로 활동하며 만평을 그렸다. 매번 그릴 때마다 주간 교수님께 검열을 받았지만 수정을 거치지 않고 한 번에 실린 적이 없었다”며 “4ㆍ19 혁명 특집호를 위해 만평을 그렸을 때는 총 19번의 수정을 거친 적도 있었다”고 검열의 압박을 토로했다. 당시에는 완성된 신문을 인쇄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달에 한 번도 힘들게 인쇄했다. 제날짜에 신문을 찍어낸 적이 없을 정도로 검열과 수정이 반복됐다.

4ㆍ19 혁명이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이라는 이유만으로 특집호는 상당한 검열을 받아야 했다. 만평은 신문에 실린 풍자만화로 인물이나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평하거나, 당시에 일어난 여러 가지 세상일을 해학과 풍자로 그려낸다. 하지만 이때의 만평은 그저 신문 한 편을 채우는 그림에 불과했다. 만평만이 아닌 모든 기사가 그러했다.

5ㆍ18 광주 민주화 항쟁 발생 무렵 군부정권 아래서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하거나 학교 내 불합리한 일을 폭로하는 기사를 작성한 신문을 만드는 것이 완전히 불가능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하에 있어서 제주대신문은 국립대라는 이유와 함께 검열에 더 큰 잣대를 들이밀었다.

정권이 아닌 학교를 비판하는 기사를 작성하는 것조차 상상할 수 없었다. 모든 기사는 작성하자마자 검열을 받아야 했다.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1차로 검열을 한 후 2차로 부주간 선생님, 3차로 주간 교수님의 검사를 받았다. 만일 정권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거나 비판을 하고 현 정권에 저항을 담은 기사라면 가차 없이 삭제됐다. 학교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하는 일을 글에 담을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대학신문이 아닌 대학 홍보물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학교의 감시를 받으며 기사는 작성됐다. 학교 내의 행사를 있는 그대로 기록해야 했으며 불합리한 일에 대해서는 함구해야 했다. 봄이 와도 꽃이 피었다고 적을 수 없었고, 학생들의 활기찬 대학 생활을 담을 수 없었다. 필요성이 사라진 신문에 학우들의 관심도는 떨어졌고 신문 구독률이 저조해졌다.

기자들의 투쟁을 담은 소식지 ‘외길’.

김경호씨는 “82년도 즈음 겨울방학 무렵 학생들의 구독률이 낮다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었다. 필요한 정보를 전혀 담고 있지 않으니 당연한 결과였다”며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학생 기자들의 솔직한 기사를 담은 ‘외길’이라는 소식지를 작성했다. 대학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해보자는 다짐으로 시작했다. 12면의 지면에 들어갈 글을 손으로 직접 작성하고 약 3000부에 달하는 유인물을 찍어 배포하기 직전 들통이 났다”며 “체포되기 전 모든 소식지를 불태워 증거를 없앴다”고 당시 언론탄압에 대한 투쟁을 전했다.

올바른 길을 포기하지 않고 가자는 의미의 ‘외길’소식지는 결국 불태우기 직전에 숨겨둔 한 장만 남았지만 그는 당시 학생 기자들이 언론탄압에 대항했던 열정 가득한 행동들은 잊지 못할 투쟁의 결과물이며 경험이라고 자부했다.

그는 “당시 그렸던 만평 대부분을 뺏겼다. 숨겨놓은 일부만 남아있다”며 “그리고 싶은 만평을 그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에 끝까지 싸워보자는 일념 하나로 신문을 만들었다. 하지만 소식지 ‘외길’이 불타던 순간의 허무함은 말로 이를 수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신문다운 신문을 만들어보자는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루지 못한 채 졸업을 했다. 신문사 동기들과 쓴 소주를 들이마시며 언제쯤 읽히는 신문을 만들 수 있는지 한탄을 했었다. 그렇게 졸업한 것이 가장 아쉬웠다”고 말했다.
“졸업 후 제주대신문을 몇 번 받아볼 때 드디어 탄압이 사라졌다고 느낄 수 있었다. 89년도 무렵 민주화가 불타던 학생 운동에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엿볼 수 있었다. 그때 제주대신문이 바뀌고 있음을 알았다. 자유롭게 의사 표현을 하고 원하는 기사를 싣는 걸 눈으로 보니 실감이 되더라”고 억압이 사라진 제주대신문을 말했다. 또한 그는 “내가 편집국장에 있을 때 자유를 겪지 못한 것은 정말 아쉬웠다. 항상 자유를 꿈꿨지만 그 이상을 바라볼 수 없음에 한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졸업 후 받아본 신문에서 자유를 봤을 때의 그 한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언론이 억압당하던 때와 정반대로 현재는 그 누구도 언론의 자유를 박탈할 수 없다. 언론으로서 근거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해야 하는 것에 쓰여야 하는 것이 언론의 자유이며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그 자유 덕분에 자신의 생각이 마치 팩트인 것처럼 전달하는 가짜뉴스가 넘쳐나고 있다. 그 시절에 목숨을 걸고 지키려던 자유를 얻고 나니 몇몇은 그 자유를 원하는 곳에 필요한 만큼 사용하고 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애쓰던 선배들의 땀을 한 방울만 느꼈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한 거짓의 펜을 휘두르지 말아야 한다.

그는 현시대의 젊은이들에게 “동즉사이즉생이라는 말이 있다. 남들과 같으면 죽고 달라야만 산다는 말이다. 학교에서 준비하는 것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찍어내는 붕어빵과 같다. 하지만 이제는 남들과 다른 자신의 것을 찾아야 한다”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 일을 하면 평생 후회하지 않겠다는 것을 느끼며 행복하게 사는 것이 성공한 삶이다. 옆에서 준비하는 것을 똑같이 따르는 것은 절대 우리 사회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 남과 똑같이 살지 말고 자신을 차별화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언론사의 미래에 대해 “자신이 학창시절에는 신문 언론이 가장 독보적이었다. 지하철에서 대부분이 종이 신문을 펼쳐보고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현재는 종이신문을 보지 않고 스마트폰을 쳐다보는 현실이다. 언론사는 이제 종이신문을 뛰어넘을 무언가를 고민해야 한다”며 “요즘 가장 많이 사용하는 유튜브를 보면 몇십만을 넘기는 구독자를 보유한 사람들이 일반 언론사보다 나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제 시대 변화의 흐름을 빠르게 간파해야 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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