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삶터는 4ㆍ3을 기억하는 기억저장소
국방부와 경찰의 사과와 생존 수형인의 무죄판결까지

월령리에 위치한 무명천 할머니의 생가.

제주도의 봄은 4ㆍ3과 함께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제주 4.3은 제주도민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4ㆍ3 이후로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홀로 외롭게 살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가 있다. 4ㆍ3의 진실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무명천 할머니의 생가에 다녀왔다.

할머니의 간이 제사상이 차려진 곳에는 방문객들이 놓고 간 음식의 흔적이 있다.

◇무명천할머니의 삶을 들여다보다

무명천 할머니의 본명은 진아영이다. 할머니는 4ㆍ3 때 경찰이 무장대로 오인해 발사한 총에 턱을 맞고 쓰러졌다.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턱을 잃었다. 그 후 무명천으로 턱을 가린 채 55년의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다. 평생을 무명천으로 얼굴을 감싸고 살아서 ‘무명천 할머니’라고 불린다.

진아영 할머니의 생가는 한림읍 월령 선인장 마을에 위치해 있다. 마을 표지판을 따라 걸었는데 마을 한바퀴를 돌아도 할머니의 생가는 보이지 않았다. 지도에 검색해도 나오지 않아 헤메고 있었는데 마을 주민분께서 월령리 복지회관 근처에 할머니의 생가가 있다고 알려주셨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 안쪽에 조용히 위치해 있었다.

할머니의 생가에는 살아있을 때 쓰던 물건과 할머니의 삶이 그대로 남아있다. 집안에는 할머니 체취와 함께 젊었을 때의 사진과 하얀 무명천, 옷가지 등이 있다. 마당에는 빨래판과 고무 물통, 알루미늄 양동이, 세수대야 등이 그대로 있어 할머니가 살고 계신 집에 무턱대고 들어온 느낌마저 들었다.

사고 이후 무명천 할머니는 마음의 문을 꼭꼭 잠갔다. 경찰과 군인을 보면 그날의 끔찍함과 참혹함이 온 몸을 덮쳐 트라우마로 공포에 질려 온몸을 덜덜 떨고, 두려움에 짓눌려 며칠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하물며 옆집에 갈 때나 잠깐 집을 비울 때도 대문과 방문에는 늘 자물쇠를 걸고 다녔다. 할머니가 사용하던 자물쇠꾸러미는 손때가 타 반질반질해 있었다.

턱을 잃어버린 할머니는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음식을 먹을 수도 없었다. 할머니는 남들 앞에서 먹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했다.

마을 제사나 잔치가 있어도 절대 다른 이들 앞에서 음식을 먹지 않았다. 음식을 제대로 씹을 수가 없어 늘 위장병과 영양실조로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할머니가 사용하던 파스와 약들은 힘든 하루하루를 약에 의지하며 살아간 날들을 나타내는 듯했다.
할머니는 아픔과 상처를 무명천으로 가리고 외로움과 슬픔을 견뎠다. 턱을 감싸기 위해 사용했던 천, 찢어지면 천을 바느질하기 위한 실과 바늘은 여전히 70년 전에 머물러있던 할머니의 기억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아픔과 슬픔을 평생 감추고 살아야 했던 할머니는 제주 4ㆍ3의 슬픈 얼굴이자 제주의 아픈 얼굴이다.

마지막까지 할머니의 옆에 있어준 것은 가해자의 사과, 국가가 아닌 가족들이었다. 2008년 제주주민자치연대는 진아영 할머니의 삶을 기억하고자 ‘진아영 할머니 삶터보존 위원회’ 를 발족했다. 할머니의 안타까운 삶이 알려지면서 페인트, 도배 등의 물품과 재능을 기부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며 무인도 같았던 할머니의 삶터가 다시 북적북적해졌다. 할머니가 살던 집은 작은 박물관 형태로 개조됐다.

진아영 할머니는 4ㆍ3의 대표적인 후유 장애인이다. 마지막까지 4ㆍ3의 비극을 반증하듯 국가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핍박 받는 삶을 살았다. 850만원의 치료비 이외에는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다. 시대가 바뀌어 4ㆍ3 특별법이 제정되고, 4ㆍ3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며 평생의 한을 풀 수 있는 시절이 왔지만 평생을 고통 속에 지내다 눈을 감았다. 진아영 할머니의 삶터를 보존하는 것은 생가보존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무명천할머니의 삶터는 71년전 그 날을 기억하는 기억저장소로의 역할을 해야 한다. 할머니의 삶을 기리고 기억하는 것이 제주 4ㆍ3을 올바로 보는 길이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살아오신 할머니가 우리에게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한 말들을 이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듣고, 할머니와 4ㆍ3을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국방부와 경찰 처음으로 공식사과 결정

4ㆍ3은 제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1999년 제주 4ㆍ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 2000년 ‘4ㆍ3 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구성, 2003년 제주 4ㆍ3 사건 진상보고서의 최종 확정 및 정부의 사과 등으로 국가공권력에 의한 대규모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사과와 명예회복이 이뤄졌다. 이와 동시에 4ㆍ3 사건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이 국민들에게 알려졌다.

지난 2003년 정부가 4ㆍ3에 대해 처음으로 공식사과 했다. 하지만 직접 가해자인 국방부와 경찰은 그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올해 4ㆍ3 71주년을 맞아 4ㆍ3당시 양민 학살 책임이 있는 군ㆍ경 당국이 처음으로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공식 사과하기로 했다. 제주4ㆍ3희생자유족회 등에 따르면 유족회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면담을 통해 국방부와 경찰청이 4ㆍ3 사건에 대해 공식 사과하기로 했다는 확답을 받았다고 밝혔다. 현재까지 사과 표현 수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정해지진 않았지만 4ㆍ3 추념식 전후로 국방부 장관과 경찰청장이 공식 사과할 것으로 보인다.

◇4ㆍ3 생존 수형인의 완전한 무죄 판결까지

1999년 제주 4ㆍ3 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는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 지하 서고에서 4ㆍ3 수형인 명부를 발견해 언론에 처음 공개했다. 대토벌 작전으로 죽은 줄 알았던 사람들이 군사재판을 받아 교도소로 끌려간 사실이 세상에 밝혀졌다. 이들은 1948년과 1949년 두 차례 군법회의를 통해 내란실행, 국방경비법 위반 등의 혐의로 제대로 된 재판 없이 전국의 교도소로 끌려갔다. 4ㆍ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수형인 명부를 토대로 2000년부터 전국 형무소 순례를 했다. 수형인 명부로 확인된 인원만 2530명에 이른다.

살아생전 억울함을 풀어야 한다는 생존 수형인들의 희망은 간절했다. 하지만 4ㆍ3은 공소장과 판결문이 없다. 소송요건을 갖추지 못해 재심이 어려웠다. 다행히도 제주 4ㆍ3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도민연대는 법무법인 해마루의 장완익 변호사를 만나 재심을 청구했다. 결국 검찰은 2018년 12월 17일 결심공판에서 생존 수형인 18명에게 70년 만에 사실상 무죄에 해당하는 공소기각 판결이 내렸다.

4ㆍ3 생존 수형인에 대한 ‘무죄’가 전국에 공표됐다. 법무부는 인터넷 홈페이지 ‘무죄재판서 게재란’에 4ㆍ3 생존 수형인에 대한 재심 판결문을 올렸다. 이로써 4ㆍ3 생존 수형인들은 완전히 무죄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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