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지사회교육과 교수

퇴임을 앞두고 돌아보는 인생이 허허롭다. 괜한 열정에 눈이 멀어 맹목으로 달려 온 길은 아니었는지. 식어가는 마지막 불씨로 나를 밝혀보며 지나쳐버린 길을 되돌아보는 일, 떠날 연구실에 앉아 옛 그림책을 한 장 두 장 넘겨보고 있다.

우리의 옛 그림에는 당나귀를 타고 돌다리를 건너는 선비의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신잠의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탐매도’가 나를 사로잡는다. 내 가슴에 오랫동안 웅크린 갈망의 불똥을 살려주려나. 뛰어난 시인이며 화가였던 선비.

그의 탐매도에는 거대한 암벽이 자리하고 있다. 그 암벽의 머리 끝에서 폭포의 물줄기가 떨어져 내리고 양 옆으로 잔설에 덮인 바위가 있다. 그 바위 사이를 건너가는 다리 위에는 당나귀를 타고 가는 선비가 보인다. 저 멀리 눈 속에 꽃을 피운 매화나무가 청아한 자태로 선비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선비는 나귀의 등에 앉아 왜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있는 걸까?

신잠은 정치가 무엇인지를 잘 아는 선비이자 시ㆍ서ㆍ화에 고루 능한 예술가였다. 1521년 정치적 난리 속에 시골로 내려가 은거하며 좋은 시를 많이 썼다.

궁핍한 땅이 되레 소박한 은거지가 되었네

뜰 앞 소나무는 늙었으니 학이 깃들 것이고

그의 시구를 가슴 속으로 읊조리며 그의 그림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아찔한 세상을 등지고 나귀의 등에 올라탄 선비의 얼굴빛이 창백하면서도 여유롭다. 어차피 떠날 곳이 아닌가. 백년을 산다 해도 먼 길을 가야하는데 굳이 머물 까닭이 없지 않겠나.

그래서 선비의 등 뒤로 떨어져 내리는 폭포는 맑으나 큰 소리가 없다. 선비와 소년처럼 눈짓만 오고 간다. 서로의 마음을 읽어내는 영혼만이 그림 속에 살아있다. 산 속의 고요와 적막, 여백과 암시가 잘 어우러진 한 편의 시와 같은 그림, 탐매도에는 그윽한 매화 향기가 스며있다.

매화를 이야기 할 때마다 빠질 수 없는 선비로 맹호연이 있다. 나이 사십 때 당나라 현종으로부터 벼슬자리를 권유 받았으나 단호하게 거절했다. 산수를 매우 좋아했던 그에게는 명예나 권력보다 자신이 원하는 진정한 길이 따로 있었다. 유독 매화를 사랑하여 나귀를 타고 설산에 들어가 매화를 찾아다녔다. 이런 이야기가 후대의 선비들에게 전해지면서 탐매행은 맹호연처럼 살아가려는 성숙한 선비들의 자아표현이었다. 그러다보니 매화를 찾아 떠나는 일이 군자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거쳐야하는 길이 되었다. 예로부터 묵객들이 즐기는 매ㆍ란ㆍ국ㆍ죽 사군자 묵화에도 으뜸으로 매화가 빠지지 않고 있다.

눈이 녹으면서 비로소 선비의 길이 보인다.

그들은 나귀를 타고 자기 자신의 내면을 향하여 힘껏 고삐를 잡아 당겼다. 성긴 눈발이 남아있는 정신 세계를 향해 묵묵히 걸어 들어갔다. 매화는 선비의 절개와 용기와 희망을 상징하는 꽃이다. 그 매화를 만나려고 얼어버린 손으로 고삐를 당기며 굽이굽이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매화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진리를 찾겠다는 탐구의 길이면서, 참다운 선비의 의미를 깨닫기 위함이 아니던가. 험한 세상을 이기고 깨어나 희망을 알리는 고고한 향기, 외부 세계나 타인들과의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 그들은 선비로서 곧은 절개를 포기하는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어떤 유혹이나 억압이 가는 길을 막아서도 그걸 뚫고 찬란하게 개화했던 그 불멸의 용기와 강력했던 내면 의식이 먼 훗날을 살아갈 후손들에게 생명력을 불러일으키는 이정표를 남겼다.

다행히 나에게도 마지막까지 초심을 잃지 않았던 선비에 대한 기억이 있다. 삭풍에 휘날리며 남몰래 숨어 울던 늙은 매화나무. 꽃 피울 힘은 커녕 살아갈 기력조차 얼마 남아있지 않았으나, 깊은 뿌리였던 당신의 다짐 그 소중한 처음으로 돌아가 조그마한 불씨를 지펴 올리는 걸 봤다. 춘설 흩날리던 그 날 말라비틀어진 고목의 생가지가 연분홍 꽃을 들어 올리는 그 지점, 침묵과 고요가 울림과 향기로 바뀌는 그 순간이 나에겐 영원으로 남아 있다.

영원을 향해 떠나야 한다. 섬에도 머나먼 길이 있다. 그 누구도 고사목이 되어가는 운명은 피할 길이 없다. 갑자기 피는 꽃도 없다. 있다면 그건 향기 없는 조화다. 깊은 산속이 아니어도 고목으로 자란  매화나무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있을 것이고, 그 매화의 향기를 찾아 미련 없이 떠나는 길, 뚜벅뚜벅 내면의 힘으로 외로이 가야만하는 길이 오늘날 늙어가는 지식인의 희망찬 행로가 아닐는지.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