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경제의 주역을 담당했던 제주해녀
여성집단에서 주도한 최대규모의 항일투쟁
노동운동과 항일운동의 성격 나타내

독립운동가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씨의 흉상이 전시돼있다.

“대한독립만세” 100년전 선조들은 조국의 독립을 희망하며 외쳤다. 일제는 칼과 총을 들이밀며 저지하려 했으나 한마음이 된 그들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중국의 5.4운동, 인도의 독립운동 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에도 큰 공을 세웠다.

2019년은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주의 3대 항일운동이라 불리는 법정사 항일운동을 시작으로 조천 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지역, 계층에 상관없이 제주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에 기자는 각 현장을 답사하고 제주항일운동의 모습을 전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제주해녀박물관에 있는 해녀항일운동기념탑의 모습.

◇해녀박물관을 방문하다

따뜻한 봄이 왔음에도 제주의 바람은 날카롭다. 100여 년전 조국을 뺏긴 아픔을 잊지말라는 자극의 칼날 같다. 제주의 동쪽에서는 어떤 항쟁이 일어났었을까. 3월의 어느날 구좌읍 하도리에 위치한 제주해녀박물관을 방문했다.

제주도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해녀들은 끈질긴 생명력과 강인한 개척정신으로 전국 각처와 일본 등지로 원정물질을 다니면서 제주 경제의 주역을 담당했던 제주 여성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기록을 보면 이건의 ‘제주풍토기’와 이익태의 ‘지영록’에는 잠녀로, 위백규의 ‘존재전서’에서는 해녀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이를 통해 제주해녀의 기원을 알 수 있다. 또한 제주의 해녀들은 1932년, 일제의 수탈에 맞서면서 권익보호를 위해 항일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렇듯 오랜 세월 이어 온 제주해녀문화의 가치와 보전의 필요성이 인정돼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해녀박물관은 총 3개의 전시실로 이뤄져있다. 1전시실은 해녀들의 의ㆍ식ㆍ주 모습을 보여주며 생활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2전시실에서는 제주해녀들의 바다 일터와 역사, 공동체 문화를 볼 수 있다. 3전시실에서는 해녀들의 경험담, 회고 등을 통해 생애를 알 수 있다. 주말을 맞아서인지 가족단위의 방문객이 박물관을 많이 찾았다. 손자들과 함께 동행한 할머니는 과거 자신들의 경험을 얘기하기도 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의 전개과정과 의의

제주해녀항일운동이란 일제강점기인 1931~1932년 세화, 하도, 종달, 성산, 시흥, 오조, 우도 지역을 중심으로 8개월간 연인원 1만7000여명의 제주 해녀들이 참가해 일본인들의 수탈에 대항해서 238회의 시위를 벌였던 항일운동이다. 어민 항쟁으로는 전국 최대규모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제주해녀들은 일본에 불만이 많았다. 어렵게 따낸 해산물을 강탈하다시피 헐값에 사 가는 것도 모자라 입어료, 어획물 처분 등 불이익을 받았다. 이에 해녀들을 보호하기 위해 1920년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을 조직했고 1930년에는 김태호 등이 중심이 돼 제주도사로 조합장을 겸직하게 해 해녀조합을 만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합은 일본인 상인들과 결탁해 해녀들의 권익을 지속적으로 침해했다. 수탈상황을 보면 입어료, 지정판매제, 해조회사에 대한 수수료, 조합에 대한 수수료 등을 지불하게 됐고 생산자인 해녀의 몫은 5분의1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에 불만을 느낀 해녀들은 1932년 1월, 시정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주도사에게 제출한다. 하지만 제주도사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이에 1932년 1월 7일, 세화장터에 모인 세화, 하도, 종달, 우도 등 해녀 300여명이 호미와 빗창을 들고 모여 제주읍에 있는 조합사무실로 향했다. 이것이 제1차 세화리 시위다. 이에 당황한 경찰들은 제주도사를 만나게 해준다는 약속을 하고 1차 시위는 해산시켰다.

2차 시위는 5일 뒤인 1월 12일에 일어나게 된다. 신임제주도사가 도일주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구좌면과 성산면에서 온 해녀복을 입은 천여명의 해녀들이 그를 에워싸면서 시작됐다. 경찰들은 칼과 발길질 해산을 시도했지만 해녀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당황한 제주도사는 그들의 요구 조건을 최대한 들어주겠다고 말을 하고 인근 세화주재소로 피신한다. 이 일로 당시 주동자였던 해녀회장 부춘화(당시 25세), 김옥련(당시 23세), 부덕량(당시 22세) 등 주동 해녀 20여명이 구속된다. 이에 분노한 해녀 500여명이 동료 해녀를 구출하기 위해 세화주재소를 습격한다. 하지만 전라남도에서 지원온 경찰에 의해 진압되게 된다.

해녀 항쟁 이후 제주지역의 항일 운동은 다수의 주도 청년들이 붙잡힘에 따라 침체기를 맞게된다. 일제는 강력한 탄압정책을 실시했고 1940년 들어서는 일제가 실시한 국가총동원령에 따라 해방 전까지 징병, 징용, 강제 노역 등의 참혹한 시기를 겪게 된다.

◇제주해녀박물관 방문을 마치며

실내에 있는 전시실을 모두 보고 밖으로 나오면 해녀광장이 눈 앞에 펼쳐진다. 특히 언덕 위에 있는 제주항일운동기념탑이 눈에 띈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해녀들의 항일운동을 기리고자 세운 이 탑을 통해 그들의 정신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기념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기록 돼있다. ‘잇따라 숱한 애국청년들과 함께 해녀들은 감금되고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무자비한 일제에 끝내 굽히지 않았다. 제주해녀의 결사적 항일운동은 단순한 생존권투쟁을 뛰어넘어 일제강점기 한국의 항일운동사상 연인원 1만7000여명에 이르는 여성주도의 독보적 일제항거라는 점에서 천수만대에 길이 찬양할만한 그 역사적 의미가 찬연하다’.

기념탑 옆에는 3명의 해녀 흉상이 세워져 있다.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씨가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2003년과 2005년에 각각 독립운동에 대한 공을 인정받아 노무현 대통령에게 건국포장을 받았다. 현수성(제주해녀박물관 문화해설사)씨는 “이 3분께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와 기록이 남아있어 독립유공자로 지정됐다”며 “하지만 나머지 해녀들은 그 증거가 불충분해 아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몇 가지 측면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가 크다. 첫째, 여성집단에서 주도한 최대규모의 항일투쟁이었다는 점이다. 순수한 여성집단에 의해 연인원 1만7000여명이나 절실하게 생존권을 획득하기 위해 강력하게 투쟁을 벌인 사례는 일제강점기에 찾아보기 힘들다. 둘째, 국내 최대규모의 어민투쟁이었다는 점. 셋째, 일제강점기에 제주도에 발발했던 3대항일운동의 하나라는 점이다. 넷째, 1930년대 국내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고 추정되기 떄문이다.

현수성씨는 “거시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여성이 참여 했다는점,규모, 기간, 저항의 강도를 봤을 때 일제강점기 시절 경제적 수탈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항일운동이기에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미시적으로 봤을때는 자신의 노력과 가치가 짓밟히는 과정 속에서 벌인 노동운동으로도 볼 수 있다”며 “자신의 권리를 요구하고 경제권을 지키기 위한 투쟁이었다. 두가지 측면을 균형있게 봐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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