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한 항일운동
역사적 사료 부족으로 유공자 지정 힘든 부분 많아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는 사실 기억해야

“대한독립만세” 100년전 선조들은 조국의 독립을 희망하며 외쳤다. 일제는 칼과 총을 들이밀며 저지하려 했으나 한마음이 된 그들은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바람을 타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중국의 5ㆍ4운동, 인도의 독립운동 등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임시정부 수립에도 큰 공을 세웠다.

2019년은 3ㆍ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해다. 전국각지에서 일어난 항일운동, 제주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제주의 3대 항일운동이라 불리는 법정사 항일운동을 시작으로 조천 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등 독립에 대한 열망이 지역, 계층에 상관없이 제주 곳곳에서 일어났다. 이에 기자는 각 현장을 답사하고 제주항일운동의 모습을 전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법정사를 방문하다

1918년 10월 7일, 서귀포 도순리의 법정사 승려들이 중심이 돼 국권회복을 목적으로한 무장 항일운동이 일어났다. 도순리 인근 마을 주민 700여명은 승려들을 도왔고 제주도 내 최초의 항일운동,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최대의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라 불리게 된다.

벚꽃이 만개한 4월의 어느날, 서귀포시에 위치한 법정사를 방문했다. 제주항일기념관, 제주해녀박물관과는 달리 산 속에 위치해 있어 접근하기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라산 둘레길과 연결돼 있어 사람들의 왕래는 잦았다. 입구에는 안내판이 있는데 의열사,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상징탑 등에 대한 위치가 소개돼 있다.

◇법정사 항일운동의 전개과정

일제는 1906년 제주부를 제주군으로 개편한 이후 행정을 장악하고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기 시작한다. 1918년경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횡포를 인식하고 있었다.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시기에도 제주도민들은 일제의 행정 장악과 경제적 수탈에 의한 피해를 직접적으로 느꼈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 방동화 등은 1914년부터 일본의 국권 침탈의 부당함을 신도들에게 설명하며 항일의식을 심어준다. 거사 실행 6개월여 전부터는 조직을 구성했고, 독립을 위해 일본인 관리와 상인을 제주도에서 쫓아내겠다는 요지의 격문과 곤봉, 깃발 등을 사전 제작하고 화승총을 준비한다. 그리고 계획적인 사전 준비 끝에 1918년 10월 7일 거사를 실행한다.

법정사 예불에 참석했던 34명의 선봉대가 중문리에 도착했을 때 인근 마을에서 동조해 참여한 주민은 700여명이었다. 선봉대장인 강창규 스님의 지휘 아래 전선과 전봇대를 절단 및 파괴하고 일본인 일행을 몽둥이와 돌멩이로 때렸다. 또한 중문리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해 불태우고 일본 경찰 3명을 붙잡고, 무고하게 감금돼 있던 13명의 구금자를 풀어준다. 하지만 총으로 무장한 서귀포 경찰관 주재소 기마 순사대의 공격으로 참여자들은 흩어지게 되고 참여자 중 66명이 검거되고 법정사는 불태워진된다.

법정사 항일운동은 1918년 실행돼 3ㆍ1운동보다 5개월여 먼저 일어났는데, 일제는 법정사 항일 운동의 파급을 걱정해 3ㆍ1운동 참여자들보다 무거운 형을 집행한다. 주모자인 김연일 스님이 징역 10년형을 구형 받는 등 법정사 항일운동 참여자 46명에게 소요 및 보안법 위반죄라는 형이 선고된다. 일본은 국권회복과 일본인을 제주도에서 몰아낸다는 것을 거사의 목표로 내걸었을 뿐 아니라 사전 계획에 의한 조직 구성과 무기를 준비한 무장 항일운동인 법정사 항일운동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된다. 이에 일제는 경찰의 수사단계를 건너 뛰고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 검사분국에서 사건을 처리하게 된다. 재판 전 가혹한 조사와 옥사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죽음을 맞이한다.

무오법정사항일항쟁은 원래 보천교도의 난 등으로 폄하돼왔다. 하지만 1992년 재판기록이 발굴됐고 1994년에는 명예회복을 위한 지역주민들의 청원이 있게된다. 1995년 중문 JC에서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모 서제와 만세대행진을 시작했고 1996년, 무오법정사항일항쟁성역화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면서 성역화사업이 본격 추진됐다.

법정사 항일운동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상징탑.

◇현장의 모습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대 등 건물 흔적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현장에서 직접 확인해본 결과 26평 정도의 작은 절이었으나 30여명의 사람들이 머물렀다고 한다. 구석에 있는 가마솥의 모습을 통해 힘들었던 당시 상황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상징탑은 입구에서 150m 정도 올라가면 확인할 수 있다. 다른 항일기념탑에 비해 화려하진 않았지만 ‘항일운동 송치자 66인 형사사건과 수형인 명부’와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에 대한 설명, 관련 기념조각 들이 있다. 능선의 끝으로 올라가면 의열사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원래 나무로 전각을 짓는 것이 원칙이나 이곳은 습기가 많은 관계로 시멘트로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의열사 안에는 초상화들이 전시돼있는데 크레용으로 그려졌다. 일부 초상화들은 여성스러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는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항일지사의 경우 손녀나 딸 사진을 참고해 그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제주항일운동을 마치며

제주의 항일운동은 조천만세운동, 해녀항일운동, 법정사 항일운동 외에도 다양한 의병활동으로 전개됐다. 일제에 항거한 자랑스러운 역사지만 안타까운 점은 존재한다. 가장 큰 문제는 이들에 대한 보상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항일운동 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재판 기록과 조서 작성 당시의 호적, 본명, 나이 등 다양한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일치하지 않아 유공 인정을 받기 힘든 경우가 많다.

또한 해방 후 월북을 한 기록으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조천만세운동을 이끌었던 김장환은 사회주의 전력을 이유로 항일유공자에 지정되지 못했고, 해녀항일운동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은 증거 불충분으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법정사 항일운동 또한 마찬가지다.

일제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권력자나 지식인들은 숨거나 친일을 했다. 항일운동을 전개했던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쳐 투쟁했다. 하나의 뜻은 작고 미미할 수 있으나 뜻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행동한다면 어떤 위기도 이겨낼 수 있음을 제주의 항일운동은 보여주고 있다. 역사는 기억한다. 우리가 항일운동의 역사를 잊고 산다면 힘들었던 과거의 역사는 반드시 되풀이 될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란 사실을 기억하면서 항일운동의 역사가 100주년을 넘어 1000주년, 10000주년까지 지켜지고 기억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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