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학생들이 과제물을 작성하다 파일이 지워졌다고 말하면 이해가 잘 안 됐다. 계속 저장하며 작업할 텐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어, 곧이곧대로 믿기가 솔직히 어려웠었다. 저마다 방법이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새로 저장하기’한 파일을 십여 분 간격으로 스스로에게 메일로 보내놓고, 컴퓨터 폴더에도 파일명에 일련번호를 붙여가며 차곡차곡 저장해 둔다. 그러니 이따금 실수로 몇 문장 삭제된 적은 있어도 몇 시간동안 쓴 분량이 통째로 사라지는 참사는 발생한 적 없다. 직접 겪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일이 일어났던 것은 중요한 원고의 제출 마감 전날이었다. 한 선배 선생님이 감사하게도 지구 건너편에서 초고를 검토하신 다음, 워드 프로그램의 변경내용 추적 기능으로 코멘트를 덧붙여 보내주셨다. 그분의 조언들로부터 도출해낸 결론은 원고의 상당 부분을 ‘다시 쓰라(rewrite)’였다. 이미 밤 9시 무렵이었지만, 마감 앞둔 막바지 단계이니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밤 새어 글을 고쳐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지막 단락의 수정을 앞두고 창밖을 보니 어느덧 동틀 무렵이었다. 잠 좀 깨고자 세수하고 돌아와 파일을 다시 열었는데, 원고가 8시간 전 상태로 저장되어 있는 것 아닌가? 그 사이 작업한 내용은 사라지고 없었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내게 쓴 메일함’의 원고들을 열어보았으나 모조리 그 상태였다. 폴더 속 저장파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워드에서 변경내용 추적 기능 설정을 지우고 거기 덧대어 작업했는데, 뭔지 모르지만 이와 관련된 기술적인 문제인 듯했다. 인터넷에서 검색한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도 사라진 글은 복구되지 않았다.

얼른 정신 차리고 다시 써야 그나마 기억이 복원될 테지만 속상한 마음에 머릿속은 하얗게 됐다. 복기하려 애쓸수록 아까 쓴 문장이나 단어 자체가 떠오르는 대신, 그 문장에서 단어 하나 바꾸는 데도 얼마나 고민했던가만 또렷해졌다. ‘나는 지금껏 8시간 동안 자다 이제 일어난 거야’라 자기최면을 걸어 위안을 얻고자 했으나 그럴수록 내면의 목소리가 얄밉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잃어버린 단락들을 결코 기억에서 건져내지 못할걸?”

가까스로 마음을 가다듬고 책상 앞에 앉았다. 포기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힘겹게 다시 써내려가기 시작한 글이, 그런데 아까 지워진 글보다 열 배나 좋아져 있는 게 아니겠는가? 기억 안 나서 어쩔 수 없이 새롭게 집어넣은 문장들이 안 들어갔더라면 큰일 났을 결정적인 문장들이었다! 논문을 쓰다 보면 ‘이거 망했다’는 직감이 들 때가 있는 반면(사실 거의 항상 그렇다), 내가 써놓고도 문장들이 탐스러워 보이는 순간도 가끔 존재하는데, 그때가 바로 그런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글을 복구하려 고민하는 과정에서 원본이 미처 가닿지 못하였던 지점에 다다랐던 것이다.

우리네 삶 자체도 그러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잃어버린 무언가로 인해 더욱 아름다운 무언가가 만들어지는, 그런 삶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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