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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금남로의 거리, 역사의 현장으로 발걸음하다5ㆍ18역사의 현장을 마주한 역사 기행
제주 4ㆍ3과 광주 5ㆍ18을 잊지말고 기억하길
5월 18일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은 5ㆍ18 민중항쟁의 역사를 기리기위해 전남대학교에서 금남로까지 행진을 하고 있다.

5월의 광주는 피로물든 영령들을 기리는 추모의 물결로 가득하다. 학내동아리 사회인문학 ‘쿰’과 ‘평화나비’는 5월 17일 광주로 떠났다. 사회인문학 동아리 쿰과 평화나비는 매해 5월 광주로 떠난다. 도내 청년 21명과 청소년 2명이 총23명으로 결성됐다. 이에 기자는 5ㆍ18민중항쟁의 역사와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유적지를 방문해 느낀점을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기획하게 되었다.
<편집자 주>

◇17일 첫째날 / 5ㆍ18 역사기행의 발걸음

광주로 도착한 이들은 구도청 국립아시아 문화전당으로 향했다. 구도청은 5ㆍ18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에 맞섰던 시민군과 항쟁지도부의 활동 중심지이자 5월 27일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최후 항쟁지다. 도청은 당시 학생지도부 상황실 및 수습대책위원회와 항쟁 지도부 회의실이었던 본관건물, 시민대표와 학생지도부의 기자회견이 이루어진 별관으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예전모습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훼손돼 있었다. 당시 총탄사용의 흔적이 있던 벽면은 재건공사로 인해 시멘트로 뒤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고, 유가족들은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달라며 990일째 농성중에 있다.

오후 1시부터는 팀별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이들은 전남대 병원과 계림동에 위치한 5ㆍ18최초 발포지, 505보안부대, 들불야학 옛터를 방문했다. 전남대 병원은 80년 당시 부상자들을 이송하며 시민들이 두 팔을 걷고 헌혈을 하기 위해 줄을 섰던 장소다. 5ㆍ18 최초발포지는 계엄군이 처음 총기 발포를 해 사상자를 낳게 한 장소다. 505보안부대 옛 터는 계엄군의 주둔지로써 광주의 ‘빨갱이 소탕작전’의 전말이 모두 이행됐던 곳이다. 당시 광주의 시민들이 “505보안부대로 끌려가면 사람 형상을 하고 나오지 못한다”며 “불구가 돼 나오기 십상이고 몸이 성한들 정신이 나가 인간처럼 살기 어려웠다”고 전해질 만큼 갖은 치욕스러운 고문들이 자행됐던 곳 이다.

학생들은 들불야학 옛 터로 발걸음을 옮겼다. 5ㆍ18당시 들불야학 학생들은 언론기관의 왜곡 보도와 미화기사에 무능함을 느꼈고 자체적으로 투사회보를 제작해 시민들에게 정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이날 학생들은 “영화에서 재현됐던 곳을 실재의 장소에서 보니 감회가 다르다”며 “아픈 역사를 잊지 않겠다”고 전했다.

◇18일 둘째날 / 금남로, 항쟁으로 맞섰던 거리를 걷다

둘째날 사적 1호인 전남대학교로 이동했다. 1호의 사적지로 지정될 만큼 전남대학교는 중요한 장소다. 전남대학교는 5ㆍ18 민중항쟁 최초 발원지이다. 5월 17일 전남대에 주둔한 계엄군이 도서관에서 공부에 전념하고 있던 학생들을 구타하고 불법 구금 하는 등 이유없는 폭력진압을 함으로써 항쟁의 불씨는 타오르기 시작했다. 현재 전남대학교 교정은 민주화운동의 역사를 한눈에 느낄 수 있다. 5ㆍ18기념관, ‘임을 위한 행진’조형 예술작품, 사범대 1호관 광주민중항쟁도,윤상원 열사공원, 교육지표사건 기념비 등 학내 열사들을 기억하고 민주화에 힘썼던 터전에 대한 자긍심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외에도 전남대학교는 박관현 열사, 윤상원 열사등의 행적을 기념비와 기념관으로 남겨 후대의 학생들에게 그들의 정신이 이어지도록 애쓰고 있다.

오후가 되자 학생들은 전남대학교에서 금남로까지 거리를 행진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들과 결합했다. 고려대와 이화여대를 비롯한 대학별 학생회와 진보적 성향을 띈 동아리들이 합류해 전남대학교 입구에서부터 본관까지 다수의 구성원들이 줄 지어 행진했다.

이날 학생들은 5ㆍ18망언의 주범 “전두환을 규탄한다” 와 “5ㆍ18역사왜곡 자유한국당 해체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어 학생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과 ‘광주 출장가’를 불렀다.

학생들은 머리에 띠를 두르기도 했고 장구와 꽹과리로 흥을 돋우기도 했다.

행진대열 옆에는 경찰들이 줄지어 경호 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민들은 아랑곳 하지않고 행진 대열을 향해 손을 흔들고, 철물점 상인은 학생들에게 물을 갖다 주기도 했다. 행진이 끝난 뒤 금남로에서는 범국민 대회가 이어졌다.

◇19일 셋째날 / 대동세상을 꿈꾸다

셋째 날 학생들은 망월동 민주묘역을 순례 했다. 묘역에는 두 개의 대칭되는 사각기둥의 석조물 추모탑이 있다. 이는 <당간 지주>를 형상화했는데 두 손을 모으고 있는 형상은 추모의 염원을 상징한다.  바로 옆에 자리한 군상 환조는 <무장항쟁 군상>으로 불리우며 불의에 저항해 총을 들고 항쟁하던 시민 군을 형상화했다. <대동세상 군상>은 슬픔을 딛고 승리를 노래하며 질서와 치안유지를 위해 노력하는 1980년 5월 당시의 “대동세상”의 뜻을 지니며 묘역을 수호하고 있다. 국립 5ㆍ18 민주묘지는 당시 희생자들이 폭도로 몰리는 상황에서 손수레로 몰래 숨겨 만들어졌고 5ㆍ18민주유공자법 제정에 따라 신묘역으로 국립묘지가 확장됐다.  이곳에는 5ㆍ18민중항쟁 사망자 또는 행방불명자와 당시 사망자가 안장돼 있다.

학생들은 5ㆍ18당시 계엄군에 의해 처음 사망한 고 김경철 열사의 묘비로 향했다. 김경철 열사는 최초 희생자로 당시 신분증을 보여주며 자신이 청각장애인임을 밝혔음에도 일부러 ‘벙어리’ 흉내를 내는 것이라며 구타했고 김경철씨는 결국 사망했다. 이후 공수부대원들은 가족들의 동의 없이 시신을 101사격장에 암매장했으나 후에 망월동 국립 5ㆍ19묘지로 이장됐다.

2묘역에서 박현숙 열사의 묘비로 향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박현숙 열사는 화순으로 가는 버스를 탑승한다. 그때 요란스러운 총소리가 났고 운전기사가 쓰러졌다. 버스는 도랑으로 빠졌고 이후 자안으로 총을 치켜든 군인들이 몰려와 총을 쐈다. 그 속에서 박현숙 열사는 일곱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다.

오후에는 5ㆍ18희생자 유가족 간담회가 진행됐다. 유가족 간담회 중 고 김경철 열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에 도청으로 급하게 갔는데 얼굴 한쪽이 맞아서 형상을  알아볼 수가 없는 이에게 우리아들 어딨냐고 물었다”며 “그 뒤 그 이가 내 아들임을 알게 됐고 아직도 그  설움에 잠을 자다 깨기 일수다”고 말했다.

유가족 어머니들은 “우리가 해야할 일은 최후 항쟁지였던 도청이 더 이상 재건되지 않게 막는 일”이며 “5ㆍ18의 진상 규명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학생들은 유가족의 설움이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너도나도 눈물을 흘렸다.

류미선씨는 ‘제주4ㆍ3과 광주의 5ㆍ18을 잇다’ 기행에 대해 “80년대 광주와 40년대 제주는 레드컴플렉스의 대상이었다”며“반공을 외쳐야 했던 역사 속에서 우리는 끝까지 민주화를 외쳤다”며 “내가 앞으로 가야할 길에 대해 자각하는 기행이 됐다”고 말했다.

전예린 기자  webmaster@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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