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고 보니 말이 조금 이상하다. ‘청년다움’을 되찾자‘, 또는 ‘청년의 권리’를 되찾자 정도가 정확한 표 것 같다. 하지만 되찾아야할 것, 그러니까 원래는 있었는데 잃어버려 회복해야 하는 것이 ‘청년’ 그 자체라는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겠다.


청년은 항상 ‘골칫거리’였다. 기성세대에게는 언제나 그랬다. 청년은 낡은 전통과 관습을 불편해 했다. 그래서 저항했다. 당장에는 규칙과 질서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은 사회가 정체되지 않게 하는 생명력이었다. 낡은 것을 불편해 했기에 청년은 파격적인 ‘상상’을 할 수 있었다. 예술과 학문의 새로운 조류는 그렇게 해서 탄생했다. 정치적 행위에 따르는 기회비용을 계산하기 보다는 눈앞의 불의에 맞서 앞뒤 재지 않고 분연히 일어섰던 것도 청년이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이런 ‘청년’은 상실됐다. 청년들 스스로가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한 때 청년이었던, 그리고 ‘청년’을 만끽했던 앞선 세대들이 빼앗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청년 문화의 위기를 말하고 청년 ‘문제’를 말하고 청년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청년의 에너지, 도전, 청년의 상상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꼰대’들이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청년’이 대학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학은 ‘청년’의 상상이 발휘되고, 저항의 문화가 싹트는 변화의 중심이었다. 치열하게 논쟁했으며, 그러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유대감을 체험했다. 그렇게 연대가 만들어졌다. 질풍노도의 에너지는 한 때의 열정으로 소진되지 않고 정치적으로 모아 질 수 있었다.  


지금의 대학은 ‘경쟁력’이라는 이름으로 이 모든 기회를 박탈하고 있다. 사회 전체로 보면 발전의 동력을 상실한 것이다. 학생들은 인적 자원으로 관리되는 ‘상품’으로 ‘생산’될 뿐이다. 상상하고 실험하는 ‘청년’은 잃어버린 채로 사회로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청년’을 되찾는 것은 ‘청년다움’ 또는 ‘청년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꼰대들이 청년을 지원한답시고 만들어낸 수많은 프로그램에 가두어질 수 없는, 돈 몇 푼 쥐어주고는 전혀 청년에게 어울리지 않는 기준을 훈계하는 꼰대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상을 실험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 어떤 것도 결정되지 않는 불안감에서 오는 고통, 하지만 그 고통마저도 옆의 친구들과의 ‘작당’에 의해 젊음으로 향유될 있는 청년의 문화를 되찾아야 한다. 


‘작당’과 ‘상상’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는 청년들에게 또 한 번의 진부한 ‘훈계’일 수 있다. 혼자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앞선 세대에게 따져 물으라는 것이다. 응답할 꼰대들도 있다. ‘아직 늦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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