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문화의 역사 현장 화북포구
유배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기회 마련

‘2019 화북유배문화제(주최·주관 제주시)’가 9월 27~28일 제주시 화북동 화북포구 일원에서 개최됐다. 유배인을 맞이했던 제주의 옛 관문, 화북포구는 많은 유배인들이 오갔던 역사와문화의 현장이다. ‘화북, 유배문화로 역사를 품다’가 주제인 이번 문화제는 제주의 유배문화유산을 널리 알리기 위해 기획됐다.  <편집자 주>

 

 

참가자들이 세한도 탁본체험을 진행하고 있다(위). 유배지 도보특강을 진행하고 있다(아래)

 

첫날은 추사 김정희의 유배생활을 재연한 ‘다시 추사를 만나다’ 공연이 열렸다.  제기차기, 투호던지기 등 전통놀이경연이 펼쳐졌고, 탐나라 난타와 퓨전국악 소리께떼의 축하공연이 진행됐다. 화북포구의 저녁놀과 어우러져 연출된 개막식이었다.

둘째 날은 화북을 배경으로 한 우리나라 대표 민속마당극인 ‘배비장전’이 진행됐다. 어린이 해신제ㆍ바릇잡이ㆍ어린이 별도연대 등 화북의 역사를 느낄 수 있는 체험활동은 학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제주 유배인들의 마음과 정신을 표현한 판소리와 가을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골든실버의 7080공연으로 폐막식이 진행됐다.

유배전시관에서는 유배전문가(양진건, 김진철 교수)의 특강이 이틀에 걸쳐 펼쳐졌다. 유배음식 체험관은 유배인들의 편지글 등을 통해 고증된 유배음식들을 전시했다. 인목대비모의 유배생활이 담긴 술, 대비모주를 시음할 수 있는 기회도 마련됐다.
 “푸짐하게 차린 음식은 두부ㆍ오이ㆍ생강ㆍ나물이고, 성대한 연희는 부부ㆍ아들딸ㆍ손자라네”는 제주식생활에 뿌리를 둔 김정희의 밥상철학이다. 음식과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소소하게 묻어난 그의 심정을 엿볼 수 있었다.

축제에 참가한 오지은씨는 “평소 제주문화 관련한 축제를 자주 다닌다”며 “오늘 세한도 탁본 체험을 했다. 김정희 선생님이 유배생활 하시면서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돼 신기하고 존경스럽다”고 했다. 그는 이어 “많은 분들이 와서 유배문화제를 함께 즐겼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제주도로 떠나는 길

조선시대 제주로의 유배는 떠나는 그 길부터 험난했다. 한양해서 출발해 육로로 전라도 남해안까지 간 후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야 했다. 바람이 맞지 않을 경우 배를 띄우지 못해 한참을 기다리기도 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다가도 언제 세찬 풍랑이 닥칠지 알 수 없었다. 중국, 일본, 멀리 동남아시아까지 표류되기도 했고, 심한 경우 배가 침몰돼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위험과 불안 속에서 한 달 가까이 바다를 건너야 겨우 제주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김정희는 유배 당시 바람을 잘 만나 동이 틀 무렵 출발해 석양 무렵에 제주에 도착했다. 제주 사람들은 하루 만에 바다를 건넌 것은 보기 드문 일이라면서 ‘배가 날아서 건너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제주로 유배 온다는 것이 얼마나 고되고 어려운 일이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당시 바다를 건너는 것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운명을 하늘에 맡기는 것과 다름없었다.

◇외롭고 고된 유배생활

힘들게 도착한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은 이제 시작이다. 유배의 유형 중 ‘안치’는 유배인의 거주를 일정한 장소에 제한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중 유배인이 머무는 집 둘레에 가시덤불을 둘러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위리안치는 가장 심한 형벌로 손꼽힌다. 위리안치 생활을 한 광해군의 유배생활은 엄격한 관리 속에 이뤄졌다. 바깥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방문을 닫아 막고 자물쇠까지 채웠다. 유배의 고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형벌이었다.

◇제주에 온 사람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까지 수많은 유배인들이 제주를 다녀갔다. 광해군을 비롯한 왕족들, 정승, 판서 등을 지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한 사대부들, 과거 시험 부정행위자, 도둑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최익현, 김정희, 광해군, 이건이 있다. 

“그래도 먼데를 구경했다 자랑하리”는 최익현의 <면암집> 일부 내용이다. 최익현은 흥선대원군의 실정에 대해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1873년 제주로 유배 오게 된다. 1년여의 유배생활 끝에 해배가 됐지만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라산에 올라 그 유명한 〈한라산유람기〉를 남겼다. 그는 유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먼 곳을 한바탕 구경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마음을 위로했다. 

“이제 풀려 돌아가니”는 김정희의 <완당전집> 일부 내용이다. 김정희는 1840년 동지부사에 선발돼 창창한 미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시기하는 반대파의 모략으로 누명을 쓰고 제주에 유배됐다. 화북에 첫 발을 내딛은 김정희를 맞이한 것은 귀양다리를 구경하려는 아이들의 시선이었다. 8년 3개월간에 걸친 유배생활을 견디고 드디어 해배가 돼 돌아가게 된다.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지만, 제주바다는 그를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험한 파도 때문에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김정희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남해신에게 바치는 제문을 해신사에 바쳤다.

광해군은 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나 제주로 유배를 오게 됐다. 그는 제주에 유배온 지 4년이 되던 해인 1641년 음력 7월 1일에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다. 제주에서는 음력 7월 1일이면 광해군이 죽은 날이어서 비가 온다는 속설이 전해지며, 이를 광해우(光海雨)라 부른다.

‘가장 슬픈 것은 파도소리이다’는 이건의 <규창집> 일부 내용이다. 이건은 누명을 쓰고 죽은 인성군의 셋째 아들이다. 이건은 제주의 여러 풍습을 기록한 ‘제주풍토기’를 남겼는데, 17세기 제주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건은 7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다 강원도 양양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됐다. 배를 띄었지만 풍랑이 거세 돌아오기를 두 번이나 했다. 세 번 만에야 무사히 제주를 떠날 수 있었다.

◇유배가 남긴 것

예술은 고통 속에서 피어난다고 한다. 제주의 낯선 환경은 유배인을 정신적, 육체적으로 고립시켰지만, 그들은 굴하지 않고 학문적, 예술적인 성과를 만들어 냈다. 눈병으로 고생하면서도 붓을 드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던 추사 김정희. 어떤 이는 추사체가 제주유배시절 비로소 완성이 됐다고 말한다. 그가 그린 〈세한도〉, 제목 그대로 ‘추운 시절의 그림’이다. 그럼에도 친구를 향한 그의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는 그림으로 지금까지도 그 가치를 인정 받는다. 

최익현의 〈한라산유람기〉와 이건의 〈제주풍토기〉, 김윤식의 〈속음청사〉 등은 지금까지도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활용된다. 그들이 남긴 기록이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가 됐다.

김해숙(제주문화관광해설사)씨는 “유배도 하나의 문화다. 제주로의 유배가 문화 발전에 큰 도움을 줬고, 그중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의 많은 유물ㆍ유적이 남은 곳이 화북이다”며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덮여있던 곳이지만 이번 축제를 통해 되살아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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