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길에 제자들이 소리 높여 신을 찬양하는 것을 힐난하는 이들에게 예수는 “잘 들어라, 그들이 입을 다물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라고 따끔하게 꾸짖었다. 성서의 이 구절은 제 목소리를 내어야 할 때 침묵하는 이들을 일깨우는 경구로 자주 인용된다. “사회구성원 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인정되는 공통된 의견”인 여론이 권력 등의 방해 없이 자유롭게 개진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두 말이 필요 없는 상식이다.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지금으로선 이 상식도 “팩트 체크”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논어에는 여론과 관련된 장면이 이렇게 서술되고 있다. 자공이 “모두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떤가요?”라고 묻자, 공자는 “글쎄다.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노릇이겠지)”이라고 말꼬리를 흐린다. 그러자 자공은 다시 “모두가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라고 묻는다. 그러자 공자는 “글쎄다, 그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노릇이겠지). 하지만 착한 사람들이 좋아하고, 못된 사람들이 미워하는 사람만큼은 못되겠지.”라고 대답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하는 것만으로는 옳고 그름을 알 수 없다는 이야기다.

혐오사회라고 할만큼 여론이 분열된 시대를 살고 있다. 인권이 개인의 권리로 인식되면서 십인십색, 백인백색, 사람 수만큼 많은 입장이 개진되고 허용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이 편 아니면 저 편” 식의 대결양상뿐이다. 나에게 득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반대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여론을 조성하는 쪽도, 수용하는 쪽도 시끄러운 것보다는 조용하게 지나가는 편을 선호한다. 침묵하는 다수가 여론과는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금과옥조로 내세우면서 말이다.

우리대학에서도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일에 이른바 학내구성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다양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방안이 마련되어 있다. 전공과 학과 의견 조회에서부터 공청회, 각종 전문 위원회의 심의절차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절차와 제도를 마련해두고, 실제로 시행 중이다. 하지만 이 모든 절차와 제도들이 사실상 말 그대로 “절차적 정당성 확보”의 근거로 활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공문은 공문으로만, 공청회는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출석과 의견제시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실이 없다는 말이다.

대학이 지성의 전당이라는 것이 상투적인 수사에 그쳐서는 안 된다. 대학본부의 방향 제시와 정책 결정과는 다른 목소리를 성가시게 생각한다면 올바른 변화, 곧 진보나 혁신을 기대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합리적인 판단과 적극적인 의견 개진 대신, 자기중심적인 요구와 반대에만 매몰된다면 ‘우리 대학의 미래’는 보장될 수 없다. 인공지능과 대화하는 방법까지도 배워야 한다는 좋은 시절이다. 이 좋은 시절에 자유롭고 의사 표명의 장을 마련하고, 그러한 공론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부터 해낼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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