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공권력과 인권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민중의 불만 쌓여 발생한 대만 2ㆍ28사건 취재기

>> 대만 2ㆍ28기념관을 방문하다

공원 한 켠에 희생자를 추모하며 평화를 기원하는 작은 탑이 세워져 있다.

타이완 해협을 두고 중국 본토와 150km 떨어져 있는 대만은 1949년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 정권이 이전해 성립한 국가다. 현재는 세계 각국이 ‘하나의 중국’을 지향하는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교를 수립하면서 단교를 시작했고 국제적 고립화가 진행중이다. 

대만에는 제주의 4ㆍ3처럼 영문도 모른채 국민이 죽어간 사건이 있다. 1947년 2월 28일부터 약 3개월간 대만 전역에서 일어난 2ㆍ28사건은 대만 민중이 국민당 정부의 폭압에 맞서 싸우다 약 3만명(2ㆍ28사건 연구보고)이 학살당한 사건이다.
기자는 2ㆍ28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타이베이에 위치한 얼얼바 기념공원(2ㆍ28평화기념공원)과 2ㆍ28기념관에 방문했다.  <편집자 주>  

◇얼얼바 평화기념공원과 2ㆍ28기념관 방문

 

타이베이 2ㆍ28기념관 내부 모습(위). 기념관에 있는 2ㆍ28 비극을 보여주는 조형물 모습(아래).

 

기자는 제주-대만 직항노선을 이용해 대만에 도착했다. 현재 제주-대만 직항노선은 최근 타이베이ㆍ가오슝 노선을 신규 취항한 제주항공을 비롯해 4개 항공사에서 주 14회 운항하고 있다. 일본불매운동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대만을 방문하기 위한 여행객의 수는 많아 보였다. 

연중 평균 기온이 22도로 아열대 기후에 속하는 대만은 흐린날씨가 많고 비도 많이 오는 편이다. 사람들은 가방에 작은 우산을 갖고 다녔고 편의점에는 우산과 우비의 진열이 끊기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고 조금 걷다보니 얼얼바평화기념공원이 보였다. 타이베이시에 위치한 얼얼바 평화기념공원(2ㆍ28 평화기념공원)은 1996년 2ㆍ28사건 당일 민중이 최초로 모였던 타이베이신공원이 얼얼바평화기념공원으로 개칭됐다. 이른 시간에 방문한 탓일까. 산책을 나온 몇몇 동네사람들만이 공원주변을 서성였다. 몇몇 관광객들은 사진을 찍으며 여유를 보여주기도 했다. 

공원의 중심부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기념탑이 자리잡고 있다. 희생자들의 명복을 빌고 옆에 위치한 2ㆍ28기념관을 방문했다. 기념관의 바깥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편지와 희생자들의 사진이 전시됐다. 기자는 한화 약 800원의 입장료를 지불하고 기념관 안으로 들어갔다. 기념관에는 당시 사용됐던 군모와 수통,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방송과 사진, 사건의 전개과정 등이 전시됐다.  2ㆍ28기념관은 세부 설명이 모두 중국어로 돼있다. 그렇기에 한국어로 된 안내서와 사진을 위주로 보며 당시 상황을 이해했다.

◇2ㆍ28사건의 배경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청나라는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대만과 요동반도 등을 일본에 할양했다. 일제는 대만총독부를 설치해 51년간 대만을 식민지배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하고 이후 중국국민당이 집권하는 중화민국 소속 국민혁명군이 상륙함으로써 대만은 중화민국의 영토로 복귀됐다. 하지만 중국공산당과의 내전으로 인해 대만을 관리할 여력이 되지 않았다. 결국 국민혁명군은 대만을 군사점령지역처럼 관리했고 대만 주민들은 일제의 식민통치 이상으로 가혹하다고 느꼈다. 외성인(1945년 이후 중국 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에 비해 본성인(1945년 이전 중국대륙에서 건너온 사람)이 많았음에도 요직은 장제스를 비롯한 외성인들이 차지했다. 본성인들은 외성인의 절반에 불과한 월급을 받았는데 이는 일제의 식민지배 시절보다 더욱 심한 차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만의 민심은 악화됐고 정부에 대한 실망과 불만은 쌓여갔다.

◇2ㆍ28사건과 국가의 사과

1947년 2월 27일 정부의 전매 독점품이었던 담배를 노점에서 허가 없이 팔던 린쟝마이라는 여인이 담배주류공사 직원들과 경찰에 의해 단속되고 폭행을 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이들은 담배를 팔던 여인을 상대로 총신으로 머리를 때리고 심한 구타를 가했다. 주변에 있던 시민들은 과격한 단속행위에 항의했고 두 집단사이의 충돌이 일어났다. 군중이 모여들자 직원들과 경찰은 인근 경찰서로 달아났다. 외성인 경찰이 시민을 폭행했다는 소문은 퍼져나갔고 본성인에 대한 차별로 화가 나있던 시민들은 항의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은 항의하는 시민들에게 발포했고 학생 한명이 사망하면서 불길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확산됐다. 시민들은 경찰서와 관공서를 습격하고 방송국을 점거했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당황한 행정장관은 처리위원회를 구성하고 구속자 석방, 발포금지, 사건의 진상조사를 공표한다.

원만하게 해결될 것처럼 보였던 사건은 행정장관의 계략에 의해 국면이 바뀌게 된다. 그는 앞으로는 처리위원회를 통해 사태를 진정시키려 했으나 뒤로는 시위대를 진압하기 위해 장제스에게 연락해 본토에 있는 국민혁명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지원군이 도착한 1947년 3월 8일부터 본격적인 유혈사태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군인들은 집 안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살해했다. 이로 인해 본성인 사상자가 속출하고 본성인 출신 지식인과 2ㆍ28사건을 수습하고자 모였던 사람들도 죽어갔다. 무자비한 학살은 장제스가 5월 16일 공식적으로 사태 종료를 선언함으로써 마무리 됐다. 

사건 이후 40년 동안 대만에서는 2ㆍ28사건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1987년 2ㆍ28사건 40주년이 되어서야 다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대만 총통 리덩후이가 피해자들에게 공식 사과하고 국가 차원의 배상을 약속했다. 

1991년 리덩후이 총통의 지시로 1992년 행정원이 발표한 <2ㆍ28사건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2ㆍ28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3만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다른 나라 같은 비극

대만 2ㆍ28사건은 제주 4ㆍ3과 많은 공통점을 보이고 있다. 시민들의 항의 과정에서 책임자들의 강경대응은 2ㆍ28과 4ㆍ3의 도화선이 됐다. 또한 불평등 속에서 항의하다 국가 공권력에 의한 무자비한 학살을 당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고성만(사회학과) 교수는 “모두 누적된 민중들의 불만이 폭발한 사건이다. 그들은 본토에서 파견된 군에 의해 무자비하게 학살됐고 영문도 모른채 죽어갔다”며 “두 사건은 항쟁과 학살이라는 유사성을 보인다”고 말했다.

이런 유사성 때문에 제주4ㆍ3평화재단(이사장 양조훈)은 2ㆍ28기념관과 MOU를 체결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매년 타이베이 2ㆍ28기념관에서 평화인권전시를 운영하고 있고 2016년과 2017년에는 타이베이와 가오슝에서 4ㆍ3사진전을 진행했다. 올해는 2ㆍ28기념관 요청으로 2ㆍ28기념관에서 11월 15일부터 내년 4월 30일까지 제주4ㆍ3을 주제로 전시회가 개최된다.

유광민(제주4ㆍ3평화재단) 주임은 “국가공권력에 의해 민간인들이 피해를 봤다. 그 부분에 있어 유사한 사건이다”며 “두 사건 모두 국가공권력과 인권의 시각에서 다시 바라봐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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