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현
제주대학교 공동자원과
지속가능사회연구센터 학술연구교수

학술지 오픈액세스 출판은 공공성을 가지는 학적 지식의 성장, 확대를 위해 필요하다. 출판과 동시에 논문을 온라인으로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오픈액세스 출판은 연구의 양과 질을 확대, 심화할 수 있다. 논문이 누군가가 이용하더라도 감소하지 않을 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추가로 이용하는 것을 배제하지도 않는 재화라는 점, 논문이 매매를 통해 수익을 얻고자 하는 상품으로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은 오픈액세스의 또 다른 근거이다.

한국의 오픈액세스 출판 운동은 국공립대학도서관협의회와 상용DB업체의 구독료 협상 결렬이 배경이 되어 비교적 최근에 시작됐다. 2018년 4월의 “문헌정보학 분야 학술단체의 오픈액세스 출판 선언”이 오픈액세스 출판 운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회 홈페이지와 한국연구재단 한국학술지인용색인(KCI) 등에서 이루어지는 논문 공개는 이미 오픈액세스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오픈액세스 출판은 그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인 2000년대 후반에 이미 일정부분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던 것일까?

위와 같은 의미의 오픈액세스 출판은 한국에서 수행되는 연구를 관리하는 준정부기관인 한국연구재단에 의해 정책적으로 시작되었다. 연구재단은 공공기금이 투입된 학술연구 성과물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납세자의 권리’에 기반하여 오픈액세스 정책을 추진했다. 연구재단의 오픈액세스 정책은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점점 더 많은 논문들이 오픈액세스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한국연구재단에서는 학술지인용색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연구재단 주도의 오픈액세스 출판은 KCI뿐 아니라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학술연구정보서비스(RISS),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의 국가과학기술정보센터(NDSL)와 같은 플랫폼을 통해 논문을 안정적으로 공유하고 아카이빙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아울러 연구재단 주도의 오픈액세스 출판은 영리 목적으로 논문을 수집,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긍정할만한 면이 있다. 그러나 연구재단의 오픈액세스 정책이 장점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적으로, 연구재단의 정책은 연구자들의 자율적인 학술지 오픈액세스 출판을 단순히 ‘지원’하는 정책이 아니다. 연구재단의 정책은 학술지 등재제도의 평가항목에 오픈액세스를 포함시킴으로써 학술지 발행 학회들에 오픈액세스 출판을 실질적으로는 ‘강제’하는 정책이다. 다시 말해, 연구재단의 오픈액세스 정책은 평가에 기초한 재정지원을 무기로 학회들에 오픈액세스 출판을 강제하고 이러한 강제를 통해 다시금 등재제도를 강화하는 정책이다.

물론, 학술지 등재제도에 생소한 사람에게는 등재제도가 오픈액세스 출판을 강제하고 이를 통해 다시금 등재제도가 강화되는 것이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이냐고 의아해 할 수 있다. 이하에서 살펴볼 것이지만 등재제도의 문제는 한국에서 오픈액세스 출판과 어떠한 연구를 수행하고 어떠한 지식을 생산할 것이냐는 지식 생산의 문제를 분리시켜 생각하기 어려운 지점이 된다.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등재제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지금은 학술지 평가를 거쳐서 연구재단에 의해 선정된 등재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이 연구자의 너무나도 자연스런 문화가 되었지만, 학술지 등재제도는 실은 그것이 가지는 문제 때문에 2014년에 폐지하기로 결정되었다가 시기상조라는 이유로 폐지가 유보되었던 것이었다. 연구재단의 전신인 학술진흥재단에서 1998년에 시작한 학술지 등재제도는 원래 시장화와 경쟁력 강화라는 구호 아래 이루어진 신자유주의적 고등교육 정책의 일환이었다.

학술지 등재제도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수준에 걸맞는 학술지의 질적 성장을 유도하고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도입된 것이었다.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학술활동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이를 위해 우선적으로 학술지의 국제화를 도모하여 국제적 수준의 학술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등재제도의 본래 목표였다.

목표지향적으로 추진된 등재제도는 단기간에 국제적 수준을 따라가기 위하여 가시적 목표를 설정하고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가장 편리한 방법인 계량화를 학술지 평가에 도입하게 된다. 계량화는 학술지를 발행하는 각 학회들로 하여금 등재제도가 요구하는 양적 기준에 맞춰서 학술지를 출판하는 것과 같은 식으로 학회들에만 영향을 미쳤던 것이 아니라 교수와 강사, 연구원과 대학원생 등 한국 학계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에게 심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연구자들이 등재제도의 계량화된 평가방식을 수용하면서 소위 업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등재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하는 것을 마땅한 것으로 아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일 뿐 아니라 가능한 많이 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형성됐다. 그러나 이미 교육과학기술부 학술인문과의 2011년 보고서 <학술지 지원 제도 개선방안: 현 학술지 평가제도의 학계 자율평가체제로 전환 및 우수학술지 육성>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러한 문화는 등재학술지 게재논문편수 중심의 교수업적평가로 인한 논문 실적 부풀리기와 같은 연구자의 일탈행위 조장, 학술지 질의 하향평준화 등의 폐해를 초래했다.

등재학술지 게재 논문이 많은 연구자가 우수한 연구자로 간주되는 상황에서 등재학술지 게재 논문편수를 늘리고자 실은 별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논문들이 대거 양산된 것은 학술지 등재제도가 가지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지식이 가지는 특징 중의 하나가 연구를 통해 생산된 지식이 기존 지식의 성장에 기여하고 이러한 성장은 다시금 새로운 연구의 기반이 된다는 것, 지식은 연구를 통해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일종의 공동의 부와 같은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학술지 등재제도가 이와 같은 공동의 부의 성장에 과연 기여하는 것일까?

계량화된 평가방식의 영향으로 논문이 대거 양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출판이 이루어지기까지 진정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으며 어쩌면 등재학술지에 적합한 논문형태로는 출판될 수 없을지도 모를 지식이, 그렇지만 사회와 인간, 예술과 자연 등에 대한 기존 지식을 진정 심화하고 확대할 수도 있는 지식이, 그래서 등재학술지 게재 논문 수십 편, 수백 편보다 사회적으로 더 큰 의미를 가질 수도 있는 지식이 과연 등재제도를 통해 생산될 수 있을까? 애초에 지식이란 진정 무엇이며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지식의 기여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관에 의해 추진된 등재제도가 위와 같은 지식의 생산에 기여할 수 있는 여지는 거의 없지 않을까?

연구재단 주도의 오픈액세스 정책이 등재제도를 강화한다는 문제, 아울러 연구재단에 의해 선정된 등재학술지 게재 논문들만이 오픈액세스 대상이라는 문제 등은 관 주도의 오픈액세스 출판이 가지는 한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이유이다. 그리고 이러한 고민이 등재학술지 게재 논문들의 자유로운 이용만을 목표로 하는 관 주도의 오픈액세스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오픈액세스 출판을 지식 생산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하는 ‘새로운 학문 생산 체제와 지식 공유를 위한 학술 단체와 연구자 연대’(지식공유연대)가 금년에 출범하게 된 동기였다.

지식공유연대는 오픈액세스 출판 전환을 상용DB업체에 의한 학술논문의 상품화를 거부하는 것만이 아닌 보다 더 큰 틀에서, 즉 연구재단에 의한 지식 생산의 지배를 문제시하고 학술생태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과정으로서 이해한다. 지식공유연대는 오픈액세스 출판이 학술지를 만들고 학술논문을 생산하는 주체인 학회와 연구자 주도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면서 디비피아(DBpia)와 같은 상용DB업체의 플랫폼도 아니고 KCI와 같은 연구재단의 플랫폼도 아닌 또 다른 플랫폼이 학회와 연구자가 운영의 주인이 되는 플랫폼이 필요하다는 논의를 진행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픈액세스 출판 전환에는 여러 경로가 존재한다. 이러한 전환을 학회와 연구자의 힘으로 이루는 것, 나아가 이러한 전환을 학술생태계 자체를 변화시키는 기회로 이해하는 것, 이것이 오픈액세스 출판 전환을 학회와 연구자가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사유하는 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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