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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좀 고민하면 어때? 진로는 50에도 찾을 수 있어”

≫ 다른 길, 다른 삶을 묻는다    < 6 > 이민경 청년활동가

이민경 청년활동가가 인터뷰 하고 있다.

부모와 떨어져 지낸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선생님이 해준 칭찬이 좋아 교사를 꿈꿨다. 자연스럽게 사범대에 진학했지만 학교생활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게다가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휴학까지 했다. 나만 멈춰있는 것 같았지만 군대 간 동기에게 편지를 쓰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지혜를 알려주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지리교육전공 10학번 이민경 씨 이야기다.  

스물두 살 일본에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오고, 복학한 후에는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제주평화나비’를 만들어 활동했다.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콘서트도 하고 평화비도 건립했다. 그 과정에서 어릴 적 자신과 같은 학생들을 만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공교육 교사가 아닌 다른 길로 차츰 멀어져갔다. 제주여성영화제 기획, 청소년 진로성장 프로젝트 패스파인더, 제주특별자치도 청년원탁회의 퍼실리테이터 등 청년활동가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있지만 고민은 끊임이 없다.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직업, 안정적이지 않은 수입. 그럼에도 치열한 고민이 있기에 살아있는 것 같다.

▶어떻게 사범대에 진학하게 됐나.

어릴 적부터 꿈이 교사였다. 초등학교 저학년때 형편이 어려워져서 외가댁에 3년 정도 살았다. 엄마의 사랑이 늘 필요했다. 그 결핍을 담임선생님의 관심과 사랑으로 채웠다. 칭찬을 받으면 그게 너무 좋았다. 나도 저런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 지리 과목이 너무 재미있었다. 선생님이 여행 가서 찍은 사진, 세계테마기행을 같이 보는 게 세계를 바라보는 창이 됐다. 지리라는 과목에 빠지고, 마침 제주대에 관련 학과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갔다. 집이 어려우니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했다.

▶학교생활은 어땠나.

수업이 많이 달랐다. 인문 지리에 관심이 있었고 지형학이나 기후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군대 문화, 선후배 관계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러다 부모님이 이혼했다.  학비를 댈 수 없는 상황에 휴학을 결심했다. 동기들은 자기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나 혼자 멈춰있는 듯한 무기력감이 있었다. 당시 사범대 여학생들은 차근차근 임용고시를 준비하느라 휴학을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6시까지 일하고 주말에는 공장 다니고 편의점 다니면서 돈을 계속 벌었다. 그러다 마음을 다잡게 된 게 편지쓰기였다. 남자 동기들이 군대에 갈 때 흘러가는 말로 ‘편지할게’라고 했는데, 정말로 편지를 써야했다. 쓸 말이 없어서 내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내 이야기를 적어나가니까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힘든 마음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모두가 다른 길을 걷고 있는데 뛰어가든 걸어가든 뒤돌아보든 멈추든 상관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쓰고 부모님에게도 썼다. 나에게 쓴 것이 결정적이었다. <상처받은 내면아이 치유>라는 책을 보고 7살, 10살 민경에게 편지를 썼다. ‘민경아 많이 힘들지? 괜찮아’ 오글거리지만 진짜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편지를 마치지도 못했는데 그게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스물두 살에 워킹홀리데이에 다녀왔다. 영어권에 가기는 두려워 일본을 선택했다. 1년 동안 고군분투하면서 일하면서 외국인노동자로 사는 서러움을 알게 됐다. 여성, 외국인, 노동자, 언어를 잘 못하는 상황이 겹치고 겹치니까 힘들었다. 포기하지는 않았다. 지식만 전달하는 교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 경험을 언젠간 들려주겠다는 생각에 힘들었지만 꿋꿋하게 버텨내면서 1년을 꽉 채워서 돌아왔다. 겉으로 보이는 변화는 거의 없었지만 스스로 정말 많이 성장했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 집도 구해보고 언어도 모르지만 일도 해서 돈도 벌고 그렇게 하고 나니 자신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학교 다니면서도 꾸준히 뭔가 해왔다.

복학을 하니 여동기들은 외국에 나갔거나 시험을 준비하고, 남동기들과 비슷하게 돌아왔다. 다시 위계 관계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다 관덕정 근처에 우리동네 지역아동센터에서 교육봉사를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와 비슷한 친구들이 많았다. 학교에서 차별이나 위계 관계로 지쳤던 걸 봉사활동으로 풀었다. 그러면서 ‘제주평화나비’를 시작했다. 서울의 한 여고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비 배지를 제작해서 판매하고 수익금을 피해자들을 위해 쓴다는 걸 보고 감동받았다. 학과 단톡방과 페이스북에 배지 공동구매를 주도했는데 그걸 본 학과 선배가 그 글을 기억하고 제안을 했다. 서울에 갔다가 대학생들이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는 걸 보고 나를 떠올렸다. 동아리를 해보자는 것이었다. 동아리에 대한 로망도 있어서 수락했다. 그렇게 7~8명이 모여서 주축으로 해서 개강 첫 주에 다 같이 수요집회에 갔다.  낮 12시에 진행되는데 많은 사람들이 내 일이 아니라는 듯이 모른 체하며 지나갔다. 고층건물에 있던 사람이 양치질을 하면서 시위를 쳐다보는데, 저렇게 내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살지는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무작정 부딪혔다. 같이 모여서 공부도 하고 영상도 보고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가 그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라는 걸 몸으로 익혀나갔다. 이듬해에 모든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홍보활동을 해서 15학번 신입생이 들어올 때 70명까지 모았다. 아라뮤즈홀에서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도 모시고 콘서트도 열었다. 그걸 씨앗으로 이후에는 평화비를 건립하는데 주력했다. 

▶교사가 꿈이었는데 임용고시를 보지 않고 다른 일들을 해왔다.

제주평화나비를 하면서 대표가 돼있고 기자회견 하고 1인 피켓시위도 하고 시청도 찾아갔다. 수백 명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지만 속으로는 곪아갔다. 나는 모자란 사람인데 앞에서 잘난 체 하는 게 힘들기도 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이 우울했다. 평화비 건립 이후에 대표 자리를 내어줬다. 그 즈음 제주특별자치도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서 가출 청소년과 폭력 위험에 노출된 청소년을 보호하는 일을 했다. 또 기업가정신 청년강사 양성 과정으로 고등학교에 수업도 나갔다. 기업가정신이라고 말하지만 작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해보면서 힘을 실어주는 수업이었다. 그러면서 제주여성영화제도 참여하다 보니 임용고시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교생 실습은 피할 수 없었는데, 일부러 시외고등학교를 선택해서 갔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옛날에는 그 학교 학생들이 문제아 취급받는 그런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 학생들을 만나면서 배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직접 보니 제일 보수적이고 가장 억압적이고 제가 생각하는 교육이 이뤄지지 않겠다는 마음이 굳었다. 공교육 시스템 안에서 변화를 만드는 것도 의미는 있겠지만, 임용고시는 보지 않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스스로 자신의 직업을 무엇이라고 규정하는지.

활동가라고 하는 게 가장 맞지 않을까? 제주청년협동조합에서도 일하고 제주여성영화제 일도 하고 청년원탁회의에서 퍼실리테이터도 하고 있지만 고민이 요즘 많다. 내년이면 서른이 된다. 제주평화나비 활동할 때는 돈을 다른 데서 벌어 써도 괜찮았는데 지금은 아니다. 같이 사는 친구가 있고, 미래를 계획하고 싶은데 활동가로서 사는 게 굉장히 불안정하다. 아직까지도 부모님에게 내가 무슨 일 하고 있다고 거의 말해본 적이 없다. 지금도 시험 봐서 교사 되라고 이야기를 하신다. 그러다가 2017년에 대한민국 인재상을 받았다. 그 때 자기소개를 쓰면서 해온 일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고민은 계속 하는 중이다.

▶청소년과 청년 사이를 이어주는 패스파인더(pathfinder)는 적성에 딱 맞는 것 같다.

청소년 진로성장 프로그램인 ‘패스파인더’는 교육과 청년, 청소년이라는 키워드를 다 갖고 있다. 돈 받으면서 이 일을 할 수 있으면 좋지, 마음 맞는 친구랑 하면 더 좋지, 그렇게 시작해서 거의 1년이 다 돼간다. 30명의 청년 멘토와 중고등학생 청소년 120~130명 멘티가 참여한다. 

교육청 요청으로 멘토의 기준이 뚜렷한 직업이었다. 그래서 제주청년협동조합 안에서도 멘토가 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패스파인더의 방향은 그런 것만은 아니다. 청년도 청소년도 서로 성장하는 것이다. 1박2일 캠프 때 ‘멘토가 되지 못한 우리들’이라는 토크 프로그램을 했다. 제주에 돌아와서 일을 하고 활동을 하면서 겪게 된 이야기다. 전공대로, 꿈꿔왔던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도 괜찮다. 수많은 과정 안에서 여러 가지를 해보고 직업도 바꿀 수 있다. 30~40대에, 50대에 진로를 찾을 수도 있다. 나조차도 사실 두렵고,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깨뜨려가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고민하고 있으니 살아있는 것 같은 생각이다.
 

 김태연 특별기자  webmaster@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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