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재 민기자

“희대의, 최악의, 잔혹한.”

범죄를 다루는 기사에는 이런 표현들이 단골처럼 들어간다. 범죄의 관심도에 따라 기사 제목이 달리 붙고 범죄의 잔혹성에 따라 화제성이 다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수식어가 덕지덕지 붙은 제목이라면 없던 관심도 생긴다. 뉴스의 목적은 여기서 왜곡된다.

이제는 어떤 뉴스가 인기있는가를 떠나 뉴스의 존재 이유를 생각해봐야 할 때다. 뉴스는 우리가 심심할 때 안줏거리처럼 입맛대로 고르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뉴스가 필요한 근원적인 이유는 생존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었다면 그 사실이 단순한 이야기에 그치면 안 된다. 바이러스 근원지, 증상, 전염 경로 등을 사회 구성원들이 알아야 한다. 정보를 알아야 바이러스의 위험을 인지하고 감염을 피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이처럼 정보 전달의 중요성을 깨닫는다면 뉴스가 우리 삶에 필요한 이유도 알 것이다. 
안타깝게도 뉴스는 정보 획득을 위한 목적으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뉴스가 일종의 오락거리, 호기심을 충족하는 수단으로 전락할때가 훨씬 많다. 객관성을 지키고 사실을 다룬다고 해도 결국 뉴스는 하나의 이야기다.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인기 있듯이 뉴스도 여기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 텔레그램에서 성 착취물을 제작, 유포한 혐의로 구속된 일명 박사, 조주빈을 두고 여러 말이 나온다.
‘알고 보니 그가 학보사 기자 생활을 했으며 봉사활동 팀장을 맡았고 과거에 경찰 감사장을 받았으며 ….’
학교 동창들은 그들 기억 속의 그의 모습에 대해 한 마디씩 꺼낸다. ‘그는 반에서 말이 제일 많았고 자기 주장이 강해 동료들과 갈등을 자주 빚어….’

우리는 그의 실체를 알고 싶어 하고 그의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피해자도 예외는 아니다. ‘N번방 사건’이 터지자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들이 어떤 폭력을 당했는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봤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성착취를 당했고, N번방의 노예가 됐는지 그 과정을, 이야기를 궁금해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처참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들의 아픔에 책임을 느껴야 한다.

문제는 이야기가 단순한 소비에 그치는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보는 시선이  흥미로운 소설책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야기를 들으며 희로애락의 감정을 다 느껴도 책을 덮는 순간 기억에서 사라진다. 그렇게 우리 주변 누군가의 처절한 호소가 하나의 슬픈 이야기로 끝난다. 

그래선 안 된다. 피해자의 이야기가 아닌 피해자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사람들이 이야기 이후에 필요한 대화보다 이야기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갖는 한 똑같은 이야기는 계속해서 생겨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우리의 삶은 이야기가 아니다. 적어도,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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