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픔을 미루어 남의 아픔을 헤아리고 나아가 만물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 그것이 인이요, 인간다움이다

조성식
중어중문학과 교수

장자와 혜시가 물 위에서 물고기를 감상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물고기의 노님이 참으로 편안하구나! 이것이 물고기의 즐거움이로다!”

혜시가 말했다. “그대가 물고기가 아닌데 어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그대는 내가 아니면서 내가 모를 거라 어찌 아는가?”

“나는 그대가 아니니 그대를 알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그대 또한 물고기가 아니니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

“다시 그 근본으로 돌아가자! 그대는 이미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안다!”

얼핏 당대의 논변가요 궤변의 달인(達人) 혜시의 논리에 장자의 직관이 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 만물의 보편적인 정서가 서로의 공감과 소통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안다면 장자가 물고기의 마음을 헤아렸고, 혜시 또한 장자의 마음을 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이심전심으로. 

동양 의학에서 마비의 병증을 불인(不仁)이라 한다. 마목불인(麻木不仁), 마치 죽은 나무껍질과도 같이 바늘을 찔러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마목불인이니, 그렇다면 유교에서 말하는 소위 인(仁)이란 뭐 각고(刻苦)의 수행을 통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대단한 경지가 아니라, 그저 남의 아픔을 같이 느끼고 같이 아파하는 것일 뿐이다.

소위 유학자(儒學者)들의 사변적 해석에 의해 호도되고 분식되어 대단한 실천 수행의 경지인양 오인되고 있으나 인이란 그저 주자(朱子)가 말했듯이 사랑의 원리(愛之理)로서 인간이라면 갖기 마련인 ‘마음에서 마음으로 통하는’(以心傳心)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 ‘네가 아프냐? 그러면 나도 아프다’라는.

그러므로 맹자가 우물에 빠질 것 같은 아이를 차마 그냥 보지 못하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바로 인이요, 장자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느끼고 덩달아 기뻐하는 것 또한 인이다. 나의 아픔을 미루어 남의 아픔을 헤아리고 나아가 만물의 아픔을 공감하는 것, 그것이 인이요, 인간다움이다.

바야흐로 4ㆍ3의 계절이다. 그리고 동백이 지는 계절이다. 

동백은 선홍빛 꽃잎을 하나씩 떨어뜨리지 못하고 누렇게 바랜 뒤에 통으로 떨어진다. 

기다리다 다 탄 속을 그대로 드러낸 채 가지에 매달려 쉽사리 놓지를 못한다. 그 꼴이 차마 볼 수 없는 처연한 아픔이건만 어느 누구에게는 그저 보기 싫어 외면하는 추물에 지나지 않으리라. 얄팍한 이념을 걷어내면 그 아픔이 보일 것임에도 바윗돌에 패대기친 불공감(不共感)은 7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하다. 폭도들의 폭동이었다고. 

그래서인가? 영화 지슬은 오히려 공감을 허락지 않는 듯하다. 혈육과 부부 간 생사의 별리, 그 슬프고 처참하고 상상할 수 없는 아픔, 차마 눈 뜨고 그냥 보지 못할 비극을, 영화 지슬은 고고하고 오만하게도 그저 남의 일인 양 담담하게 서술한다.

왜일까? 아픔을 외면하려는 이 불공감(不共感)의 시대에 애써 측은지심을 구걸하지 않으려는 듯하다. 해원(解寃)조차 언감생심인 양 담담하게 서술한다.

그저 이런 일이 있었다. 공감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이런 일이 있었다... 오죽했으면......!!!
“죽음 냄새 풍기며
죽음에 미친
까마귀떼 까옥까옥
아침 저녁 밤마다
불타오르던 하늘 하나
가득 날고 있었네.
...
쑥 향기 새파란 봄날에
초가집도 양민도 폭도도 경찰관도 군인도.... 파릇파릇
땅 속이거나 땅 위거나
어디에 있지? 상처투성이 싹들
이제야 조금씩 아픈 허리 펴며 일어서고
불타버린 울음 속
찢긴 역사여 잿더미 속에서
아직도 노래를 만들지 못한다.”

< 故문충성<四月祭·1> 일부 >

그래서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아직도 노래를 만들지 못하고, 세월호를 타고 떠난 아이들의 이야기도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 4월은 더욱 잔인한 달, 불인(不仁)한 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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