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설 심사평

김동현
문학평론가

이번 응모작은 모두 12편이었다. ‘여전히’ 소설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는 작품을 만나게 되어서 반가웠다. 보는 것이 읽는 것을 지배하고 있는 시대에 소설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응모작을 읽으면서 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절대적인 양을 놓고 보자면 우리는 텍스트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포털과 SNS, 그리고 수많은 문자 메시지까지. 하루에 읽어야 할 텍스트들은 차고도 넘친다. 이런 때에 소설을 쓰는 ‘행위’는 무엇일까. 소설은 그 수많은 텍스트들과 무엇이 달라야 할까. 

설을 쓰려는 학생들은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응모작들은 코로나19 시대의 삶에서부터 제주 4ㆍ3의 아픔까지, 다양한 소재를 다루고 있었다. 그러나 소설 문법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 작품도 있었다. 단편 소설이 일정한 분량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니다. 카프카의 소설들처럼 한 두장 분량의 짧은 소설들도 충분히 매혹적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작품은 포털 게시판에나 쓸법한 글들이었다. 최소한의 문단 나누기조차 지키지 않은 작품도 있었다. 

야기를 하려는 사람은 먼저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읽지 않고서는 쓸 수 없다. 글을 쓰려는 열정만큼 글을 읽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소설을 읽지 않고 소설을 쓸 수 있을까. 웹소설 몇 편 읽고 글쓰기에 덤벼들어서는 꾸준히 글을 써갈 수 없다. 글쓰기에도 근력이 필요하다. 재주가 아니라 글을 계속 쓸 수 있는 근기. 읽기는 근기를 다지는 데 필수다. 

응모작 중에서 관심 있게 읽은 작품은 ‘말순 할멍’(참고로 제주어 표기는 할망이 맞다. 표기를 바꿀 필요가 있다.)과 ‘낡은 시멘트 담벼락의 듬성듬성한 틈’이었다. ‘말순 할망’은 제주 4ㆍ3을 소재로 하고 있다. 4ㆍ3을 겪은 해녀 할머니의 이야기를 손자가 알아간다는 설정은 신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방법 역시 서툴렀다. 제주 4ㆍ3에 대한 이해 역시 단편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200자 원고지 150매가 넘는 분량의 글을 써 내려간 근기에 주목했다. 문장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처음 소설을 쓸 때 빠지는 함정은 ‘미완성의 수작’이다. 아무리 문장과 구성이 좋아도 마무리되지 않는다면 그 이야기는 그 자체로 ‘미완’이다. ‘말순 할망’은 여러 단점에도 하나의 이야기를 끝까지 밀고 갈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소설은 한순간의 재기나 반짝이는 아이디어로는 쓸 수 없다. 우직하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야 하는 시간의 예술이다. 시간을 견디지 못한다면 재주도 소용없다. 

낡은 시메트 담벼락의 듬성듬성한 틈’은 ‘말순 할망’과는 결이 다른 작품이다. 이 작품은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받게 된 거액의 보험금, 그리고 그 이후에 이어지는 두 형제의 자유분방한 삶을 그리고 있다.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거친 서사가 눈에 거슬렸다.

소설은 어떤 이야기도 가능하지만 그 이야기가 가능해지게 만드는 힘은 결국 독자를 어떻게 설득하는가에 달려 있다. 논리적 인과, 흔히 플롯이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 거액의 보험금, 그리고 대마초까지 한국에서 보기 힘든 일탈이 독자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가려면 상황이나 인물을 독자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소설 속 인물에 대해 작가 스스로 충분히 알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 단점에도 이 작품은 무언가를 읽고 난 후에 쓰고 있었다. 다양한 소설을 읽고 그것을 흉내내고 싶다는 모든 예술의 첫 단계, ‘모사’를 시도하려는 흔적이 보였다. 소설이 쓰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고 할 때 그 첫 시작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점수를 줄 만했다. 

두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는 미흡했다. 하지만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 근기를 지니고 있었다. 백록문학상이 계속해서 소설을 써보라는 하나의 격려라는 차원이라고 한다면 충분히 그런 격려를 받을만 했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정진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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