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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을 타고 제주의 고도를 만나다제주 역사 간직한 제주목 관아
500여년 동안 제주의 중심지 역할
영욕의 세월 간직한 제주 역사의 산실
  • 좌동철 제주일보 사회부장
  • 승인 2020.09.09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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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아는 58동 206칸의 규모로 지어졌다. 지금은 29동의 옛 건물과 시설물이 복원돼 있다(위). 제주목 관아에서 집무를 보고 있는 제주목사의 모습을 재현한 모습(아래).

제주성(城)은 조선시대(1392~1910년) 518년간 제주의 중심지였다. 성곽 길이는 3㎞에 이르렀고, 바다 방면을 제외해 동문ㆍ남문ㆍ서문 등 3개문이 있었다.

◇제주목 관아에서 500년간 제주 통치

이 고도(古都)는 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에서 다스렸다. 조선시대 제주목사는 군사ㆍ행정ㆍ사법 등 전 분야를 지휘ㆍ감독했다. 이런 까닭에 제주목사의 동헌은 8도 관찰사가 머물던 감영과 마찬가지로 영청(營廳)이라 불렀다. 제주목사는 병마수군절제사(兵馬水軍節制使)라는 군직을 겸임, 육·해군을 통솔했다.

조선시대 286명이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가족을 데리고 오지 못하는 변방의 수령 임기는 2년 6개월(900일)이지만 평균 재임기간은 1년 10개월이었다. 아울러 연고가 있는 관직에 제수할 수 없게 한 상피제(相避制)를 엄격히 적용, 제주 출신은 제주목사로 임명될 수 없었다.

일신상의 이유로 부임하지 못했던 이도 12명이 됐다. 6개월을 넘기지 못한 목사는 28명(10%), 1년을 채우지 못한 목사도 65명(23%)이 됐다. 파직되거나 탄핵을 받아 압송된 목사는 68명(24%)에 이르렀다. 재임 중에 노환ㆍ질병으로 사망한 목사는 21명(7%)이 나왔다.

이경록은 제주목사로 6년이나 부임했다. 임진왜란 발발로 이임하지 못했고, 성산일출봉에 성곽을 구축하던 중 풍토병에 걸려 1599년 제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286명 목사 부임… 선정을 베풀거나 또는 폭정을 일삼아

제주목사 중에는 선정을 베풀어 칭송이 자자한 반면, 폭정으로 원성을 사기도 했다.

기건 목사(재임 1443~1445)는 겨울에도 알몸으로 바다에 들어가는 해녀를 안쓰럽게 여겨 평생 전복과 미역을 입에 대지 않았다.

이약동 목사(1470~1473)는 겨울 백록담에서 한라산신제를 지내면서 동상으로 죽고 다치는 백성이 나오자 신단을 아라동 산천단으로 옮겨 제를 봉행하도록 했다. 이임 시 관물과 관복 모두를 두고 떠나는 도중 말채찍을 손에 쥐고 있자 이마저도 관덕정에 기둥에 걸어 놓고 제주를 떠났다. 그는 말년에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청렴하게 살았다.

허명 목사(1814~1815)는 채무로 백성들의 고통이 심해지자 임시방편으로 차용문서를 만들어줬다. 더 나아가 이 문서를 태우고 무효를 선언해 민초들을 구원했다. 효력이 없는 문서를 ‘허명의 문서’라 불리는 이유다.

폭정을 일삼은 목사도 있었다. 1619년 부임한 양호는 탐학이 극도로 심해 여러 차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비호로 무마됐다. 백성들은 그를 호랑이를 대하듯 두려워했다. 벼슬에 쫓겨나도 제주에 남아 행패를 부리던 그는 1623년 반정이 일어나 인조가 즉위하자 체포돼 사형 당했다.

역사 속 인물도 제주목사로 부임했다. 인조반정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어 ‘이괄의 난’을 일으킨 이괄은 1616년부터 3년간 제주목사로 재직한 바 있다.

16세기 중반 황해도에서 일어난 ‘임꺽정의 난’을 제압한 남치근은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1552년 목사로 부임해 왜구를 무찔렀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은 1864년부터 2년간 목사로 재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이자 춘향전을 프랑스어로 번역한 홍종우는 1905년부터 1년간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갑신정변의 주역이자 혁명의 아이콘이었던 김옥균을 1894년 상하이에서 암살한 인물이다.

◇제주목 관아 조선시대 내내 증축과 개축

제주목 관아(국가사적 380호)는 500년간 영욕의 세월을 보냈다. 1434년(세종 16) 대화재로 관아 건물이 모두 불타면서 소실됐다. 22대 목사인 최해산이 재건을 시작, 이듬해인 1435년 골격이 갖춰졌다. 

조선시대 내내 증축과 개축이 이뤄졌다. 관아는 58동 206칸 규모로 지어졌다. 후일의 화재를 대비하기 위해 관아 건물은 서로 닿지 않도록 건축했고 담장을 쌓았다. 

관아는 관덕정을 중심으로 좌우로 배치됐다. 좌측에는 목사의 동헌과 관아 시설이 우측에는 제주판관 집무실 등이 있었다. 이외에 좌수ㆍ별감이 집무하던 향청, 육방의 우두머리가 집무하던 작청, 군장교의 장청, 회계 사무를 관장하던 공수청, 죄인을 가두는 옥, 노비들의 거처인 관노방 등이 들어섰다.

제주시는 조선시대 관아 건물의 배치도가 확인되면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175억원을 들여 29동의 옛 건물과 시설물을 복원했다. 시민들은 기와 헌와(獻瓦) 운동을 벌여 복원에 필요한 기와 5만장 전량을 기부했다. 시민들의 정성으로 선조들의 혼과 숨결이 살아 있는 제주목 관아가 부활했다.

하지만 일제는 전국 해안과 내륙 등 요충지에 세워진 읍성(邑城)이 한민족의 단합된 힘과 항전의 상징으로 여겼다. 1910년 조선총독부의 1호 법률인 ‘조선읍성 훼철령’에 따라 읍성들은 철거돼 대부분 제 모습을 잃었다.

일제는 제주항 축항공사를 이유로 제주성 3면의 성담 대부분을 바다에 쓸어 담아 방파제 매립재로 사용했다. 현재 제주시 이도1동 오현단 일부에만 제주성지(濟州城址)가 남아 있다.

한편 제주목 관아와 옛 제주성 일대는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제주도청ㆍ법원ㆍ검찰ㆍ경찰ㆍ세무서 등 관공서가 들어섰고, 은행ㆍ증권회사가 자리 잡은 제주 최대의 번화가였다.

그러나 관공서가 속속 이전했고, 2009년 중앙로에 있던 제주대학교병원마저 떠나면서 원도심의 화려했던 옛 영광은 석양에 기울고 있다.

여느 원도심과 마찬가지로 인구가 줄고 젊은이들은 살지 않으면서 도심 공동화(空洞化)가 가속화되고 있다.
원도심에 활기를 불어 넣는 도시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다. 여기에 역사ㆍ문화 자원을 덧입히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좌동철 제주일보 사회부장  webmaster@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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