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기고]  전통시대 한국 동성애의 역사 속으로

강문종
국어국문학과 교수

우리는 최근 수많은 담론들 속에 파묻혀 지내고 있으며 그 중 동성애 담론 역시 예외가 아니다. 특히 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이 일반화 되고 대중문화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기도 하며, 퀴어문화축제가 서울과 제주에서 개최되면서 동성애 혹은 동성애자들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였다. 혹자는 혐오의 시선으로 혹자는 소수자의 인권적 시선으로 접근하고 있으며 동성애가 성소수자들만의 영역에서 나와 점차 대중성을 확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조금 아쉽다.

◇연구의 불모지, 한국 동성애의 역사 

주체적 자아가 선택하는 성적 취향의 문제를 호불호(好不好)의 시각에서 판단하지 않고 시시비비(是是非非)의 관점에서 행해지는 극단적인 주장을 목격하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은 곧바로 옳지 않다는 논리와 손을 잡으면서 자신의 생각과 다를 경우 이를 옳지 않다고 규정한 후 제거의 대상으로 규정해버린다. 이러한 인식은 여지없이 갈등을 만들어내고 우리사회를 더욱 우울하게 만들어버린다. 한 치의 앞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종종 역사에 눈을 돌린다. 과거의 사례로부터 오래된 미래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역사 속에서 동성애는 어떻게 다루어졌을까?

사실 전통시대 한국의 동성애에 대한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는 자료의 한계가 분명하고 이에 대한 용어와 개념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의 동성애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고 조선시대 역시 <방한림전>을 대상으로 한 일부 연구가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연구는 김경미의 연구다. 이 연구에서 <방한림전>에 나타난 동성애적 면모에 주목하고 이러한 특징이 조선후기 사회에 은폐되었던 동성애의 소설적 표현이었음을 조선후기 사회와 연결하여 고찰하였다. <방한림전>에 이어 서사문학 중에서는 <이성선전(李聖先傳)>에 대한 연구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방한림전>은 두 여성 사이의 연정이라기보다는 우정과 지기관계를 중심에 놓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 역시 본격적인 의미의 동성애 연구로 보기 힘들다. <이성선전> 역시 동성애의 다양한 측면을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동성애 관련 자료들은 어디에

한국의 전통시대 동성애에 대한 자료는 문종(文宗)의 세자빈 봉씨(奉氏)와 소쌍(召雙)과 관련된 조선왕조실록의 자료와 <이성선전(李聖先傳)> 등이 언급되는 정도다. 이처럼 부족한 자료는 전통시대 동성애에 대한 논의를 어렵게 하였다. 따라서 한국 전통시대의 동성애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자료의 발굴이 필요하다. 지면의 한계로 자세하게 서술하기는 힘들고 유의미한 자료들을 중심으로 몇 가지 유형으로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첫째, 왕조실록 자료이다. 세종 18년(1436, 正統 1) 10월 26일(무자) 기록부터 영조 3년(1727, 옹정(雍正) 5) 7월 18일 기록까지 4건 정도가 보인다. 둘째, 문집자료이다.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 권9, <고율시>, ‘차운공공상인 증박소년오십운(次韻空空上人 贈朴少年五十韻)’에서부터 육용정(1843~1917)의 『의전문고(宜田文稿)』 권2, <이성선전(李聖先傳)>까지 총 8건 정도가 보인다. 셋째, 총서류이다. 이규경(1788~1863)의 『오주연문장전산고』, 권43, 경사편(經史篇), 한궁대식변증설(漢宮對食辨證說)과 권8, 인사편(人事篇), 남총변증설(男寵辨證說)이 가장 대표적이다. 넷째, 야사류이다.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 권1, 갑오이전(甲午以前) 상 21이다. 다섯째, 야담류이다. 『이야기책(利野耆冊)』 소재 <여기는 어디라더냐>부터 『성수패설(醒睡稗說)』 소재 <호용문자(好用文字)>까지 총 6건 정도가 보인다. 여섯째, 소설류이다. <흥부전>과 <홍백화전>이 가장 대표적이다. 

◇전통시대에는 동성애를 어떻게 표현했을까

동성애(同性愛, homosexualite)라는 용어는 서구사회에서조차 1869년에 처음 사용되었으며, 남성들이 스스로 동성애임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사회에 결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게이(gay)’라는 단어 역시 1945년 이후부터 사용되었다. 신지연의 연구에 의하면 한국에서는 1923년부터 동성애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전통시대 동성애에 해당하는 용어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대식(對食)’이라는 용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둘째, ‘남총(男寵)’이라는 용어 역시 자주 등장한다. ‘남통(男通)과 남색(男色)’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남성이 남성을 성적으로 좋아하는 의미로 주로 사용되었다. 셋째, ‘계간(鷄姦)’ 역시 동성애의 한 범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특히‘북충(北衝)·남간(男奸)’이라는 단어가 조선에서는 계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섯째,‘풍남지희(風男之戱)’가 있다. 여섯째, ‘비역질’이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는 남성끼리 하는 성행위를 나타내는 우리말이다. 일곱째, ‘밴대질’인데, 이는 여성끼리의 동성애를 의미하는 단어다. 

◇역사적 사례

조선 세종대 세자빈 봉씨와 궁녀 소쌍 사이의 성착취관계와 소쌍과 동료 단지의 동성애 등을 통하여 왕실에서 많은 여성들 특히 궁녀들의 동성애 관계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그 어떠한 죄보다도 무겁고, 너무나도 부정적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세종은 교지(敎旨) 내용에서조차 봉씨와 관련된 동성애 사건을 완전히 삭제시켜버린다. 특히, 세종이 표현한 ‘극추(極醜)’라는 단어 속에 당대 여성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잘 나타난다.

제안대군 이현의 유모 금음물이 일으킨 동성애 스캔들 사건을 통하여 시비(侍婢)들의 동성애 경향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1482년(성종 13년)에 발생했던 이 사건은 여성 동성애자 혹은 동성애적 경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비동성애적인 특정 여성을 동성애자로 몰아 매장시켰던 음모가 입체적으로 드러나며, 이 사건은 왕실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문학적 형상화

동성애가 고전문학의 소재로 활용된 경우는 매우 드물다. 특히 여성 동성애가 고전문학 작품의 창작에 활용되는 경우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시대 공공상인(空空上人)과 박소년(朴少年)의 동성애를 묘사한 이규보의 96句 古律詩 한 편과 한 성인 남성이 이웃 소년을 사랑한 이야기를 에피소드로 활용한 조선 말기 육용정의 傳 한 작품과 남성끼리의 성관계를 다룬 야담 작품 5편 등이 보인다. 

첫 번째로 주목할 작품은 <차운공공상인 증박소년오십운(次韻空空上人 贈朴少年五十韻)>이라는 시다. 고려 문인 이규보의 작으로 유가대사(瑜伽大士) 경조(景照, 공공상인)라고 하는 고승과 박소년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다. 박소년의 영특한 재주 및 아름다운 외모와 공공상인의 고매한 정신세계가 만나서 서로 부합하게 되자, 이들에게는 남녀 사이의 연정을 뛰어넘는 동성애적 감성과 관계가 형성된다. 19세기 말 유명했던 베를렌과 랭보의 사랑을 보는 듯하다.

두 번째 작품은 <이성선전(李聖先傳)>이다. 19세기 말 육용정의 작으로 의리를 중요시 하는 이성선(李聖先)과 이웃 소년 간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다. 이성선은 아내의 사망 후 현실 도피적 상황에서 이웃집 소년과 애정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나, 소년이 다른 남자를 좋아하게 되면서 이성선의 시기심이 분출하게 되고 이성선의 칼부림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이성선의 행위를 의리(義理)로 포장한다. 즉, 이성선이 의심과 시기심으로 칼을 뽑아든 것은 옆집 소년이 약속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성의 동성애는 극추(極醜), 그렇다면 남성 동성애는

이러한 내용들을 통해 몇 가지 의미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동성애 분야에서 조차 남성중심주의가 드러난다. 우선 ‘총애하다’의 주체가 철저하게 남성으로 규정되고 있다. ‘남총(男寵)’과 ‘여총(女寵)’의 주체가 모두 남성이라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으며, 여성동성애자만을 규정하는 용어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동성애를 둘러싼 역사적 사건에서도 남성인 경우 이선(李宣)이란 인물의 됨됨이를 비판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김병국(金炳國)이라는 인물을 조롱하는 느낌 정도에 그치는 반면, 여성동성애자들에 대해서는 비록 봉씨처럼 세자빈의 위치에 있고, 왕실 종친인 제안대군의 부인이라 할지라도 철저하게 징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둘째, 남성 동성애의 문학적 형상화와 이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차운공공상인 증박소년오십운(次韻空空上人 贈朴少年五十韻)>과 <이성선전>에서 동성애는 매우 낭만적인 사랑 혹은 남성들의 의리로 포장되었으며, 야담자료에서 역시 여성동성애는 나타나지 않으면서 남녀의 학질을 치료하는 치료자 역할은 모두 남성으로 규정되어 있다. 이처럼 문학적 형상화 속에서 남성 동성애는 금기시되기보다는 낭만적이거나 기이한 이야기 혹은 우스운 이야기로 인식되고 있다.

셋째, 조선시대 동성애가 다양한 계층과 계급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동성애적 관계는 세자빈과 궁녀 사이, 시비(侍婢) 사이, 고승(高僧) 및 몰락한 양반과 소년 사이, 유명 정치인 사이, 병조판서와 노복(奴僕) 사이, 중과 남장한 과부 및 기생 사이, 건장한 남자와 학질에 걸린 남성 사이 등에서 다양한 유형으로 나타나고 있다. ‘궁인과 여염의 어린 아이 및 요사한 여중이나 천한 과부들이 서로 동성애를 한다.’는 전통시대 지식인들의 지적과 ‘전통 유교사회를 바라보는 현재적 관점에서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다양하고 많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합리적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성정체성은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이라기보다는 삶의 과정에서 주체적 자아가 스스로 선택하고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미셸 푸코의 영향을 받은 엔소니 기든스는 섹슈얼리티를 “자신의 몸과 자기정체성 그리고 사회적 규범이 서로 만나는 지점이며, 성형이 가능한 자아의 한 단면”이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각으로 본다면 각자의 성적 취향은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주어진 규범에 안에서 주체적 자아의 선택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므로 각자의 성적 취향은 비록 그것이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개인적으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며, 옳고 그름의 시각으로 규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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