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에 맞선 고려 마지막 항몽세력
망명정부 수도 성격을 띤 거점기지

>> 제주신화의 흔적을 찾아서 < 6 > 항파두성

터만 남은 항파두리 내성지.

700여 년 전 몽골 침략군을 물리치기 위해 궐기한 고려의 마지막 항몽세력이 있다. 바로 삼별초다. 강화도에서 진도로 그리고 제주도로. 최후까지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의했다. 그들의 마지막 흔적이 항파두리 항몽유적지란 명칭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복원을 위한 움직임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흔적만 남은 항파두성

항파두리 항몽유적은 사적 제396호로 제주시 애월읍 고성리에 위치한다. 항몽유적지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바로 앞 숲에 길이 나있다. 경사진 길을 오르다보면 길이가 15리(6km)에 달하는 토성이 나온다. 삼별초가 몽골군 공격에 대비해 쌓은 내·외성 중 외성에 해당한다. 단순히 흙을 쌓아 올리지 않고 4차례 걸쳐 반복적으로 다져서 만들었다. 자갈이 섞인 토양을 사용하고 흘러내림방지석을 세워 토성을 견고히 했다. 축조 당시 높이가 5m에 달했지만 세월이 흘러 많이 깎아내렸다. 지금은 길게 자란 풀들로 뒤덮여 있어 주변과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관광을 위한 계단이 있어 토성 위에 올라갈 수 있다. 해안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기에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 배를 타고 들어오는 적들의 침입을 감시하기에 용이한 지형이다.

토성을 뒤로하고 숲길을 계속 오르다보면 항파두성 내성지가 나온다. 내성은 돌로 쌓은 석성으로 지금은 그 터만 남아있다. 발굴조사는 2013년부터 2017년까지 총 5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조사 결과 항전 당시 성안에는 여러 가지 관아와 군사시설이 갖춰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아궁이와 배수로 같은 필수 생활시설도 있었다. 이러한 축조양식은 만월대라 불리는 강화 고려궁성과 진도 용장성과도 유사하다. 두 성 모두 삼별초의 이전 거점기지이다. 몽골군에 맞서며 수차례 피난을 이어온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피난해온 개경의 관리와 그 가족들 그리고 삼별초의 장병들이 기거했다. 그렇기에 당시 이곳은 일종의 망명정부 수도와 같은 성격을 띠고 있었다. 지금은 이 자리에 희생한 장병들을 기리는 순의비가 세워져 있다.

삼별초는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제주 곳곳에 남아있다. ‘장수물’ 혹은 ‘장수발자국’이라 불리는 곳은 물이 사시사철 마르지 않아 약수로 알려지고 있다. 이곳에는 전설이 얽혀있다. 김통정 장군이 여몽연합군에게 쫓기다 토성 위에서 뛰어내렸다고 한다. 그때 바위에 발자국이 파였고 그곳에서 샘이 솟아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삼별초 군사들이 과녘으로 사용했다는 ‘살 맞은 돌’을 비롯해 구시물, 옹성물, 연못지, 파군봉 등이 있다.

◇몽골군에 맞선 삼별초의 끈질긴 저항

1270년(원종 11) 2월 고려 조정이 몽골의 침입으로 굴욕적인 강화를 맺는다. 삼별초는 이에 반대해 강화도에서 전라도 진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항몽에 나선다. 그러나 결국 함락되고 삼별초의 김통정 장군이 잔여세력을 이끌고 제주로 건너온다. 몽골과 고려 조정의 회유에도 불구하고 삼별초는 굴복하지 않았다. 항파두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바닷가를 따라 장성을 쌓으며 끝까지 저항한다. 결국 여몽연합군 1만 2천여명이 1273년(고려 원종 14년) 함덕포와 비양도로 상륙해 공격한다. 삼별초군은 이에 맞서 혈전을 벌였으나 끝내 함락된다. 

마지막까지 항전하던 김통정 장군은 한라산 기슭의 붉은오름으로 퇴각한 뒤 결국 자결한다.  몽골 침입이후 40여년에 걸친 삼별초군의 항몽투쟁은 그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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