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ㆍ3의 발단부터 지금까지…
행방불명 수형인에 대한 재심 결정
고문 후유증으로 학업 중단하기도

11월 30일 4ㆍ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가 제주지방법원에서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제주4ㆍ3사건 발생 배경은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해 귀환한 제주인은 약 6만명에 달했다. 그러나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한 제주인들은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역 귀환 현상이 벌어졌다.

제조업체의 가동 중단과 높은 실업률, 양곡 정책의 실패 등으로 제주 경제는 빈사 상태에 빠졌다. 여기에 콜레라의 창궐, 극심한 흉년으로 악재가 겹쳤다. 일제 경찰은 군정 경찰로 변신했고, 군정 관리의 부정·부패는 사회문제로 부각됐다.

1947년 3ㆍ1절 기념식에선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가두행진이 이어졌다.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포하면서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3ㆍ1절 발포사건은 어지러운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다. 유혈 진압에 반발해 그해 3월 9일부터 제주도청을 시작으로 도내 95% 사업장이 참여하는 총파업이 일어났다. 미군정은 총파업에 나선 2500여 명을 구금했고, 이 중 3명이 고문으로 사망, 도민들의 반발심을 자극했다.

해방 직후 이념충돌의 소용돌이에서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남로당 제주도당 총책 김달삼 등 350여 명의 무장대는 도내 24개 경찰지서 중 12개 지서를 일제히 공격했다. 4ㆍ3의 시작이었다. 4ㆍ3이 발발한 후 8개월이 지난 1948년 11월 21일 국방부는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틀 후인 11월 23일에는 중산간 주민들에게 소개령(疎開令)을 내렸다.

겨울철 입산한 무장대에게 식량 확보를 차단하기 위한 조치였지만 해안선에서 5㎞ 떨어진 중산간마을을 적성지역으로 간주했다. 남아 있는 주민은 물론 통행자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사살하겠다는 포고령이 내려졌다.

강경 진압 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95%는 불에 타 사라졌다. 3만9285동의 가옥이 소실됐고, 이재민은 9만1732명이 나왔다. 정부에서 심의ㆍ결정된 4ㆍ3희생자는 사망 1만422명, 행방불명 3641명, 후유장애 196명, 수형인 284명 등 모두 1만4533명이다. 유족은 8만452명이다.


◇20년 만에 4ㆍ3특별법 개정안 발의

김대중 정부였던 2000년 제주4ㆍ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4ㆍ3특별법)이 제정됐다. 이후 제대로 된 진상조사가 이뤄졌고,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4ㆍ3추념식에서 정부 차원에서 첫 공식 사과를 하며 국가의 책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4ㆍ3특별법은 20년 동안 단 한 번도 개정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배ㆍ보상과 군사재판을 받고 전국의 형무소에 억울한 옥살이를 한 2530명의 수형인에 대한 전과기록 삭제가 절실해졌다.

지난 20대 국회에 이어 21대 국회에서 4ㆍ3특별법 전부 개정안이 발의됐다. 개정안의 핵심은 국가 폭력 피해자의 명예 회복(전과기록 삭제)과 배ㆍ보상이다.그런데 4ㆍ3특별법 개정안의 연내 통과가 불투명해지고 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는 지난 11월 17일과 18일 이틀간 오영훈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ㆍ제주시을)과 이명수 국회의원(국민의힘ㆍ충남 아산시갑)이 각각 대표 발의한 개정안을 상정했지만 배ㆍ보상 기준 문제로 논의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개정안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에서 판결로 지급받은 위자료 또는 배상금 총액의 평균 금액을 산정하도록 했다. 이를 근거로 4ㆍ3희생자 1인당 보상액은 1억3200만원으로 전체 보상금은 총 1조5394억4400만원으로 예상됐다.

이에 대해 기획재정부는 제주4ㆍ3을 포함,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 학살 등 전체 과거사 보상 비용에 4조8000억원이 필요한 것을 감안, 재정 부담을 호소했다. 연말까지 4ㆍ3특별법 개정안 통과가 불투명한 이유는 정부가 막대한 보상비 마련에 난색을 표명하고 있어서다.

정부는 희생자 1인당 보상액 1억3200만원을 10년 분할 지급을 검토하고 있지만, 평균 7명의 유족(직계비속)이 매월 받는 액수는 15만원에 불과해 4ㆍ3희생자유족회는 반대하고 있다.

4ㆍ3희생자와 유족에 대한 보상 기준 마련과 재원 확보를 놓고 문재인 대통령의 약속 이행을 위한 정부의 결단이 없을 경우 4ㆍ3특별법 개정안은 장기간 표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반면 4ㆍ3당시 군사재판으로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에게 검사가 일괄적으로 직권 재심을 청구, 명예를 회복시킬 수 있는 길은 열리게 됐다.

법무부는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법안심사 1소위원회에서 논의 중인 4ㆍ3특별법 개정안에 대해 이 같은 내용을 담은 수정 법률안을 제시했다고 지난 11월 25일 공식 발표했다. 이 수정안의 핵심은 4ㆍ3사건 희생자들에 대해 특별재심 사유를 인정하고 제주지방법원에 관할권을 부여, 검사가 일괄적으로 직권재심 청구를 할 수 있는 법률적 토대를 마련하고 있다.

 

◇억울한 옥살이 4ㆍ3수형인에 대한 재심 개시

4ㆍ3특별법 개정안과 별개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생존 수형인에 이어 행방불명 수형인을 상대로 재심 정식 재판이 사상 처음으로 열리게 됐다. 제주지방법원 제2형사부(장찬수 부장판사)는 지난 11월 30일 4ㆍ3당시 옥살이를 하다 행방불명된 고(故) 오형률(당시 28세)씨 등 행방불명 수형인 10명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했다.

오씨는 1948년 11월 제주시 아라동 구산마을에 살다가 마을 전체가 잿더미가 된 후 경찰에 강제 연행됐다. 그해 12월 군사재판을 받고 징역 15년을 선고 받은 후 목포형무소에 수감됐지만 다시는 고향을 땅을 밟지 못하고 행방불명됐다. 

오씨는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다른 재소자와 함께 군경에 의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故) 이기하(당시 25세)씨 동생 이상하(85)씨는 “중문에서 농사일을 하던 형님이 입산했다는 이유로 조부모와 부모, 형제, 조카까지 ‘도피자 가족’으로 몰려 8명 모두가 총살당했다”며 재심 정식 재판이 열리기만을 기다려 왔다.

재판부는 군사재판 판결문은 없지만 당시 수형인에 대해 불법 구금과 고문이 이뤄져 재심 사유가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정부의 진상조사에서 이미 희생자로 결정돼 4ㆍ3평화공원에 묘비가 조성돼 있다”며 “생존했다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고 가족들에게 연락하지 않을 이유도 없어 보이고, 피고인 중 대부분이 재적등본에 사망했다고 기재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재심 결정으로 재심을 청구한 나머지 300여 명의 행방불명 수형인에 대한 청구 사건도 재심 개시 결정 가능성이 높아졌다.

4ㆍ3행방불명인유족협의회(회장 김광우)는 지난해 6월 행불인 수형자 10명에 대한 첫 재심을 청구했다. 지난 2월 18일에는 339명이 추가로 재심을 청구했다.
제주지방법원은 2019년 1월 생존 수형인 18명의 재심 청구사건에 대해 무죄 취지의 공소기각 결정을 내린바 있다. 법원은 2019년 8월 이들에게 총 53억원의 형사보상금 지급을 결정했다. 수형기간에 따라 1일 보상금은 최저임금법상 일급(日給) 최저금액(6만6800원)의 5배인 33만4000원을 일괄 적용했다.

피해 사례를 보면 제주공립농업학교(현 제주고) 축산과 5학년에 재학 중 불법 군사재판을 받고 징역 1년을 산 부원휴(91)씨는 전과자 신세가 되면서 수의사 꿈을 접어야 했다. 4ㆍ3수형인 양근방(87)씨의 아들은 연좌제로 인해 회사에 취직한 후 3개월 만에 해고당했다.

징역 1년을 받은 오계춘(95ㆍ여)씨는 당시 10개월 된 아들을 안고 전주형무소으로 가던 중 굶주렸던 아이는 죽고 말았다. 4ㆍ3수형인들은 고문 후유증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고, 연좌제로 인해 자녀들까지 학업 중단과 취업 기회가 박탈되는 등 굴곡진 삶과 운명을 감당해야 했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