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제주 여성의 공동체 조성과 변화]

- 제주 여성 공동체와 유교의 병존양상을 중심으로 -

 

제주대학교 사학과 허선주

 

- 목차 -

Ⅰ. 서론

Ⅱ. 제주 여성신화의 등장과 변용

Ⅲ. 제주 여성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변화

Ⅳ. 결론

 

Ⅰ. 서론

유교는 사상적 측면에서 음사(淫祀)를 철폐하고, 사회적 측면에서 삼강오륜(三綱五倫)의 명분질서와 가부장적 종법질서 구현을 위한 예를 중요시 여기는 사상이었다. 당시 조선 초기는 고려부터 유지된 여러 사상과 더불어 여성의 재가(再嫁) 및 균분상속(均分相續)이 부분적으로 존재했다. 따라서 조선의 유학자들은 종교적으로 불교(佛敎)와 도교(道敎), 민속신앙을 유교사상으로 흡수 또는 억제하려 했으며 사회적으로는 가부장적 부계사회와 유동적으로 결합하려 시도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 중후기로 들어서며 유교는 당시 시대상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이식됨으로써 조선사회는 유교이념에 맞추어 운영되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제주의 여성 공동체에는 유교사상이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조선시대 제주 여성은 당시 제주도가 지닌 역사적 상황 및 지리적 허점 속에서 사회적 역할까지도 함유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한 여성상을 지닌 탐라 신화 속 여성 신들의 초월적인 힘에 의지함으로써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부분은 제주신화가 현재까지도 전해질 수 있었던 요인 중 제주 여성의 공동체성이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이 파견한 지방관(地方官)에 의해 당시 제주사회에 유교가 유입되면서 이러한 공동체적 요소들은 변화하게 된다.

주목해볼 수 있는 부분은 유교와 여성 공동체적 요소들의 병존이다. 보통의 경우 유교는 불교와 민속신앙을 축소시키며 그 자리를 대신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대표적인 사례로 제주 신화는 기존 여성 공동체가 만들어낸 민속 신앙적 요소와, 유교적 요소가 동시에 존재하는 양상을 띠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시대 제주 사회에서 존재하는 여성 공동체성을 보이는 이들이 외부에서 유입된 유교와 서로 어떤 영향을 끼치며 공존해왔는지를 살펴본다면, 이후 시대에 등장하는 여성 공동체의 변화에서도 이를 적용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2장에서는 제주 여성신화의 특징을 살펴본 뒤, 유교사회가 이입됨에 따라 어떻게 변용되는지를 설문대할망의 사례를 기반으로 유추해보고자 한다. 이는 당시 공통적인 경험을 지닌 여성 공동체가 사상의 유입에도 불구하고 굳건히 신화를 보전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3장에서는 해녀와 초알일별급의 사례를 통해, 여성 공동체가 유교 사상이 이입된 사회 내에서 어떻게 대응해나가는지에 대해 그 변화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결론에서는 본 연구에서 도출된 결과와 함께, 연구에서 확인해볼 수 있었던 의의를 제시함으로써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Ⅱ. 제주 여성신화의 변용

1) 제주 여성신화의 특징

신화는 집단 공동체의 결속을 이끌어내면서도 사회를 통제하는 중요한 기능을 하는 문화적 산물이다. 신화를 통해 전달되는 모습으로 그 사회의 특정한 사고방식과 생활양식, 당시 사람들의 본질적인 모습까지도 확인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주도 탐라 신화 역시 그 문화적 산물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특히 탐라신화(耽羅神話)는 기존 국내 신화와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무속신앙으로 전승되어 있으면서도, 민간에게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이다. 또한 신당의 주체가 되는 신격(神格)에서 여성신의 비율만 80%를 차지한다는 점은 국내 어느 지역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탐라 신화에서 여성 신의 비율이 이토록 다수를 차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제주 여성들의 삶과 연관하여 살펴볼 수 있다.

당시 제주 여성들은 제주도의 지리적 한계와 역사적 상황 속에서 집안일을 비롯하여 그들에게 부여되었던 사회적 역할까지도 함께 지니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타 지역의 여성들과 달리 비교적 환경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제주도의 척박한 자연환경과 노동의 부담 속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대안 중 하나는 바로 초월적인 힘에 의지하고 신앙심을 기르는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제주 여성의 노력이 점차 다양한 성격을 지닌 신화의 창조로 유도된 것이다. 즉, 신화를 믿고 의지하던 주된 행위자가 바로 제주 여성이라는 점은 탐라 신화에 등장하는 여성 신이 다수였던 이유를 추정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제주 여성이 믿었던 탐라신화 속 여성 신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그들에게 다가갔을까. 제주도 여성 신들의 공통적 특징은 대체로 강한 여성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신화에서 등장하는 여성들은 인생을 개척함에 있어서 능동적인 모습을 보인다. 또한 대체로 남성 신보다 능력 상 우위를 지닌 존재가 많으며, 그들 상당수가 타인이 해결하지 못했던 문제의 해결책을 지니고 있는 이들로 표현된다. 그 중에서도 몇몇 여성 신들은 태어날 때부터 신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죽음 이후 재생과정을 거쳐 특정 신의 자리에 위치함으로써 자립적으로 신이 된 경우도 존재한다. 이러한 모습은 유교적 개념에서 접근함에 있어서도 군자가 아닌 사람도 노력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과 비슷한 선상 아래 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탐라신화의 여성상에서 보이는 주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설문대할망(雪门黛婆婆)을 들 수 있다. 태초에 세상에서 가장 크고 힘이 셌던 그녀는 누워서 자던 중 방귀를 껴 천지를 창조했다. 방귀에서 비롯된 불기둥은 그녀가 바닷물과 흙을 삽으로 퍼서 꺼트렸다. 이후 설문대할망은 치마폭에 흙을 담아 한라산과 오름을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그녀가 거대한 몸으로 국토를 형성한 창조주로 등장하는 것은 국외에서 등장하는 창세신화(創世神話)적 면모와도 유사하다. 설문대할망이 강한 여성상으로써 자연과 지형을 형성한 창조의 주체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설문대할망이 거대한 자신의 몸을 가릴 수 있는 속옷을 만들어주는 대가로, 제주 백성에게 내륙까지 연결되는 다리를 만들어주고자 하는 부분은 제주 백성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존재로 등장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탐라 신화에서 등장하는 여신의 모습은 당시 제주 여성의 활동과도 결부되어 있다. 여성 신을 중심으로 무속신앙이나 굿, 신격의 체제가 갖춰지는 것은 제주 여성이 본 신앙의 주요 생산자이자 행위자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 생산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던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강한 노동 경제력은 신화 속 여신들의 상징성과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제주 사회에서 여성이 중심점이 되어 이룩한 모습이 내륙의 전통적 가족 질서와는 달리 독특한 형태의 문화로 발현되는 것이다. 특히 이후 해녀의 업무 형태가 남녀의 사회적 접촉 또는 결합에 있어서 비교적 자유로운 모습을 띄는 것은 그 문화적 형태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탐라의 건국 신화가 다른 건국 신화들처럼 정권 투쟁이나 국가 간 전쟁을 통해 남성적 권력 욕구를 드러내거나, 남성성에 의존하는 모습과 다르다는 것 역시 동일 선상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탐라 신화에서 등장하는 여성 신들의 모습이 당시 제주 사회가 지니고 있던 사회상과 더불어 민속 문화까지도 투영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 유교의 등장에 따른 설문대할망의 변용

탐라 신화 속 여성 신들은 유교사회를 거치면서 설화나 민담의 형태로 변이되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천지개벽의 내용을 함축하고 있던 설문대할망이 점차 민담화(民譚化)되는 모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또한 남성영웅의 창세신화로 등장하는 “천지왕본풀이”로 인해 그녀가 지형 창조의 신으로 격하된 것 역시 그러하다. 그렇지만 특히 설문대할망의 죽음으로 전해지는 두 가지 설화는 창조의 주체가 지니고 있는 위상과는 상당 부분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첫 번째로는 설문대할망이 자신의 키를 자랑하다가 한라산 물장오리물에 빠져 죽게 되는 모습이다. 거대한 모습으로 풍요를 가져다주는 주체로서 등장했던 설문대할망은 앞서 서술한대로 제주도와 내륙을 잇는 돌다리를 만들 정도로 거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한라산 속 물장오리 연못이 ‘밑이 없는 연못’이라는 이유만으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순은 두 번째 죽음의 모습과도 동일한 모습을 띤다. 설문대할망의 죽음과 오백장군의 이야기가 결합된 것이다. 설문대할망은 오백장군을 낳아 한라산에 살며 끼니를 거르게 되자, 아들들에게 양식을 구해오라고 한다. 이후 그녀는 큰 가마솥에 죽을 끓이며 솥전 위에서 죽을 젓던 도중, 발을 헛디뎌 솥에 빠져죽고 만다. 오백장군은 그 솥을 다 비우고 나서야 자신들의 모친이 그 솥 안에 빠져 죽었음을 확인하고, 울며 돌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전개 역시 마찬가지로 창조주였던 모습과는 달리 오백 장군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희생적인 모친으로서의 역할만 강조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천지를 창조하고 오백장군을 낳을 만큼 힘과 생식력이 막강했던 그녀가, 작은 실수 하나만으로 초라한 죽음을 맞이하는 전개는 모순된 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다. 남신보다 강한 신성을 지녔던 여신 설문대할망은 신화 자체가 제거되지는 못했지만, 그 신성이 격하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제주신화가 이전까지 성립되었던 사회상과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전개되고 있음을 추정해볼 수 있다. 즉, 탐라 여성신화의 변용은 여신 중심의 사회인 모계사회에서 남성 중심의 사회로 이전하는 문화의 이동과 역사적 변천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이행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행과정에서 등장하는 여신 신격의 축약은 힘에 의해 지배되는 남성 신 중심의 시대가 도래됨으로써, 기존의 사회상이 남성 중심 질서로 편입되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남성 중심의 사회로 이동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유교를 빼놓을 수 없다. 물론 실질적인 유교의 모습과 역사적인 전개과정 하에서 재해석되어 이입된 유교의 모습은 상당 부분 다르다. 여신이 전승되는 과정에서 변용되는 시점에 등장하는 유교는 실제 전통 유가에서 등장하는 “남녀유별(男女有別)”, “부부유별(夫婦有別)” 등 분별적인 측면과는 달리 여성에 대한 차별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사회에 적용되어 현재까지도 이어져오는 유교의 ‘차별적’ 측면은 역사 전개 과정에서 특정한 의도로 재해석된 측면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설문대할망 역시 이러한 유교적 배경 속에서 등장한 가부장적 부계사회로 ‘주변화’된 여신의 모습을 보인다. 부계 질서로의 이동은 여성성을 비교적 열등한 위치에 두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따라서 이러한 신화적 변용을 살펴볼 때, 유교문화의 가부장적 질서와 남성 중심의 사회로 이어지는 흐름은 동일선상에 놓여 있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그러한 흐름 속에서 이들 여성 신들은 제거되지 않고 민담과 설화로 변용되어 살아남았다. 유교 문화에 휩쓸려 사라진 것이 아니라, 제주인의 전승과 신앙 아래 유지된 것이다. 물론 여신을 모시는 제의와 제사집단이 축소되면서 실제 신화로서의 모습은 약화되었다. 그 권위가 추락했음에도 제주인이 가지고 있던 여신들에 대한 믿음은 지속되었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우리 표류하던 일행은 문득 한라산을 가까이 눈앞에 보고는 기쁨이 지나쳐 저도 모르게 목을 놓아 호곡한다. 한라산을 보며 절하며 축원한다. “백록선자님 살려주소, 살려주소. 선마선파님 살려주소, 살려주소.”

위의 인용문은 제주에서 육지를 향해 가던 일행이 표류 중 한라산신을 향해 구원을 청하는 모습이다. 그 기원대상은 한라산신인 선마선파, 선마고로 추정된다. 이 때 마고와 선파는 모두 할망을 뜻한다는 점에서 그 기원대상을 좀 더 좁혀보면 설문대할망일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위의 글이 이형상 목사의 신당철폐 이후 시기임을 고려해볼 때, 그 시기까지도 설문대할망에 대한 신앙이 지속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설문대할망 신화가 지니고 있던 권위는 유교사상과 함께 남성중심사회로 이어지면서 다소 추락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설문대할망 신화는 후대까지도 제주인의 의지와 소망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은 자청비, 가믄장아기 등 이외의 여성 신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이들 신들은 유교 사상에 의해 변용되었으나 제주인들, 특히 제주 여성들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유교 사회와 함께 병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신앙이 유지될 수 있었던 이유에는 제주도와 내륙 간 물리적 거리가 존재한다는 점, 여성이 중심에 설 수 있었던 문화적 형태가 존재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이후 제주신화 뿐만 아니라 제주여성이 만든 공동체가 유교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고 그들의 특성을 병존시킬 수 있었던 부분과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Ⅲ. 제주 여성 공동체의 사회·경제적 변화

1. 대외적 인식에 따른 해녀의 사회적 입지 변화

해녀는 제주의 척박한 생활환경 속 고된 노동 등으로 인해 천역으로 치부되었던 직종 중 하나이다. 결정적인 이유 중 하나는 해녀 물질에 대해 사회적 인식이 저하되었던 점이다. 자식에게 해녀 물질을 물려주는 일은 천형을 대물림하는 것으로 인식될 만큼 해녀에 대한 직업적 인식은 상대적으로 낮았다. 조선시대 전기, 해녀가 여섯 가지 천역인 6고역 중 하나로 인식되었던 것은 그들이 신량역천 계층과 다름없었다는 것을 추정해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 해녀의 이미지에 대해 고찰해보면, 오히려 강인하고 근면한 여성상과 같이 굳센 이미지를 떠올리게 된다. 이렇게 상반된 이미지는 시대가 변화함과 동시에 제주 해녀가 가지고 있었던 사회적 입지도 함께 변화했음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해녀가 등장하는 시점부터 해녀의 사회적 입지는 어떻게 생성되고 변화하는가. 이러한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유교가 제주 여성 공동체였던 해녀의 대외적 인식에 있어서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확인해보고자 한다. 또한 이를 토대로 사회적 측면에서 제주 여성 공동체가 유교와 병존함에 있어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했는지까지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주의해야 할 부분은 역사적 기록에만 의존하여 제주 해녀를 단순히 근대 이전과 이후 모두 고정된 실체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 해녀를 서술함에 있어서 역사적 기록의 모습은 당시 유교의 이미지가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이번 장에서는 해녀가 기록상에서 등장하는 모습을 기반으로 보되, 본 한계점에 유의하며 그들의 사회적 입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조선시대 제주 해녀는 이동의 자유를 제한받은 채, 고역을 부담했던 이들이었다. 과중한 진상 부담과 수탈로 인해, 함께 역을 맡았던 포작 다수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출륙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제주인의 집단이주는 출륙금지령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다수의 제주인이 빠져나간 상황이었기 때문에 해녀들은 관아에서 작성한 잠녀안(潛女案)에 등록되어 채취물의 일부를 정기적으로 상납해야 했다. 이러한 해산 채취물은 18세기에 들어서면서 완전히 해녀에게 부과되었다. 해녀가 진상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1864년 해녀에 대한 중앙정부의 역 부과가 혁파된 이후였다.

당시 해녀들을 보는 사회적 인식은 17세기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이건의 『탐라문화집 (耽羅文獻集) :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해녀를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캐는 여성’이자 ‘생복을 잡아 관아에 바치는 역을 담당하는 자’로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남녀가 뒤섞여 일하고 있으나 이를 부끄러이 생각하지 않는다.’ 라고도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기록은 그가 해녀의 작업형태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남녀의 분별을 강조했던 유교 사회 속에서 남녀가 같이 물질을 하는 것에 대한 놀라움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해녀의 옷차림인 ‘물소중이’를 입고 물질하는 것에 대해서 마치 벌거벗은 듯 서술한 부분도 존재한다. 이는 나잠어업(裸潛漁業)의 모습으로 비춰지는 물질의 모습이 과거에 제주 해녀가 천시되었던 요인 중 하나로 유추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은 위백규의 존재전서 중 금당도선유기에 등장하는 해녀에 대한 서술과도 동일 선상에 놓여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서술들은 그들이 해녀의 직업적인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채 유교 사회에서 반영되는 모습과 다르다는 이유로 천시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제주인이 아닌 외부인, 특히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 혹은 유배인들이 지닌 제주 해녀에 대한 인식은 이처럼 비판적이면서도 고정적인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입지와는 달리, 해녀가 지닌 노동력으로서의 가치는 계속해서 인정받았다. 1702년(숙종 28년) 제주 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를 비롯하여, 이원조의 『탐라록(耽羅錄)』에서도 해녀가 해삼과 전복 등 해산채취물을 진상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즉, 해녀들은 유교사회 아래에서 사회적·신분적으로 천시되었으나, 해상어업이 여성의 전유노동으로 위치하면서 점차 제주도 사회 속 노동 주체로서 인정받았다 볼 수 있는 것이다.

해녀의 노동력은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점차 중요하게 여겨진다. 해녀들은 1876년 개항 이후 타 지역으로 출가하면서 임노동을 통해 경제력을 얻었다. 1930년대에는 더 나아가 일본, 대련, 청도, 블라디보스톡까지 진출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매우 이른 시기에 제주의 노동력이 일본 경제권까지도 편입되기 시작함으로써 “탈경계적 주체”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해녀들이 기존 국가의 예속에서 벗어나 경제력을 위해 적극적으로 출가에 나서는 모습이기도 하다.

앞서 살펴보았듯 제주 해녀는 수령과 토호들의 수탈과 천시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이 역을 부담하며 버텼던 이들이다. 이들은 제주 여성이 만들어나간 하나의 공동체로써 개항 후에는 생활을 위해 출가생활도 마다하지 않았고, 이후 해녀 항일운동을 통해 여성 공동체로써 일제의 식민지적 수탈에 적극 저항하기도 했다. 타 지역의 항일 운동 중에서도 여성을 중심으로 한 공동체가 항일운동을 일으킨 사례가 많지 않다는 점은 제주에서 해녀가 지니고 있는 사회적 입지를 간접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부분이다. 유교적 배경 속에서도 여성이 비교적 강한 경제권을 지니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 이 것은 제주 해녀가 유교사상의 여파에도 지켜낼 수 있었던 사회적 입지임을 추정해볼 수 있다.
 

2. 초알(初謁)일 별급을 통해 본 여성의 경제권 변화

18~19세기 제주사회에서 유교사상은 재산상속과정에도 영향을 끼쳤다. 상속 형태를 분석하고 그 속에서 제주 민들이 지닌 가족 형태의 특징을 분석함에 있어서 특히 재산상속문서인 분재기의 별급관행(別給官行)과 관련된 연구는 주목해볼만 한 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이번 장에서 다룰 부분은 별급관행에서 여성의 재산과 관련하여 살펴볼 제주의 초알일별급이다. 혼인과 관련된 별급은 다른 지역에서도 존재하지만 대부분 혼인하는 남성이 수급자로 지정되고 여성이 수급자가 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하지만 제주의 초알일 별급의 경우, 그 수급자가 단순 여성이 아닌 며느리라는 점에서 여성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초알일 별급문기는 남편의 친족 구성원들이 며느리가 된 여성에게 혼인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약간의 재산을 별급하며 작성하는 문서이다. 이 문서는 제주도에서 주로 발견되는 상속문서로 알려져 있다. 초알일 별급의 경우 별급을 매개로 서로 다른 세대의 여성들 사이에 세대 간 상속(相續)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본 문서는 상속관행의 다양한 층위를 비롯해 여성의 경제적 위상이나 친족문화에 있어서 여성의 친족 구성원들의 참여나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 중 김녕(金寧) 김씨(金氏) 김덕경(金德鏡) 가계의 전승 문서 중 6개의 초알일 별급과 관련 있는 문서가 존재하는데 내용을 살펴보면 며느리에게 재산을 증여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초알일 별급이 제주 사회에서 여성 그리고 여성 공동체의 경제권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되는 이유는 당시 조선의 전반적인 재산상속 모습과 또 다른 양상을 띠기 때문이다. 18세기를 전후하여 조선에서는 장자우대 불균등 상속이 확산되면서 딸은 재산상속에서 점차 배제되어 갔다. 이와 동시에 혼인하면서 여성이 가져온 재산도 남편에게 귀속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리하여 자녀 없이 여성이 죽을 경우 이전에는 처가로 돌아갔을 재산을 이제는 대부분을 남편 가족이 보유하고, 나머지는 제사 상속자에게 주도록 하였다. 그러나 김씨가 혼인하면서 시아버지 김덕경이 초알일 별급으로 증여한 고복원의 밭은 남편에게 귀속되지 않고 그녀가 상속 대상을 지목해 손자며느리인 장손부(長孫婦) 군위(軍威) 오씨(吳氏)에게 상속된다.

김녕 김씨의 초알일 별급 상속과 관련해서 두 가지 측면을 확인할 수 있는데 먼저 여성이 자신의 별급을 개인적인 의도를 담아 여성인 며느리에게 상속이 가능했다는 점이 있다. 우선 앞서 언급했듯이 조선에서는 상속에 있어 부계 혈연을 강조하는 추세였고 제주도 또한 19세기 전반에는 이러한 경향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초알일 별급을 통해 제주도 지역의 여성들의 경우 남편이나 자녀와 별개로 자신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던 사회분위기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더불어 초알일 별급을 통해 여성 자신의 재산을 아랫세대의 여성에게 상속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전근대 시기 제주도 지역의 낮은 생산력으로 인해 여성 노동력의 필요성에 근거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어업과 농업을 동시에 병행해야 했던 제주 사회에서 여성들도 해녀와 농사꾼으로서의 일을 했으며, 가정과 육아까지 여성들의 책임이었던 사실을 고려하면 남성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여성노동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못했던 제주 사회의 분위기가 여성이 여성에게 넘겨주는 초알일 별급을 쉽게 반대하거나 없애지는 못 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두 번째로 딸이 아닌 손자며느리에게 상속한 점을 들 수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관계는 혈연관계가 아니다. 이 부분에서 제주의 여성이 왜 혈연관계인 딸이 아닌 며느리에게 별급을 주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옥부는 이 부분에 있어 여성들이 제주 사회의 궨당문화 안에서 여성 자신들의 인맥을 넓히기 위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제주사회에는 아들 그리고 부계 혈연의 재산상속이 커져갔다. 이에 따라 여성들은 상속과 혼인관계를 이용해 집안과 집안 사이의 폭넓은 궨당문화를 형성하고자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즉 김녕 김씨는 자신의 초알일 별급을 손자며느리인 오씨에게 줌으로써 오씨 집안의 여성들과 관계를 맺으려 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제주 여성들의 초알일별급은 한 가문의 가부장제 안에서 진행된 여성 상속관계였다는 것이다. 초알일별급이 김씨 본인, 며느리, 손자며느리 3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다. 내 아들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주는 것 또는 아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에 줄 수 있는 별급이라는 일종의 핑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는 18~19세기 유교사상 속 남성중심의 상속과정에서 얼마든지 사라질 수 있는 자신의 상속 권리를 그 대상을 남성인 아들을 통한 여성을 택함으로써 초알일이라는 별급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초알일 별급의 존재는 조선 후기 유교사상이 제주까지 확장되는 과정 속에서의 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여성의 노동력과 기존 제주사회에서의 여성이 지닌 권리의 중요성에 근거한 것이며 유교사상 속 제주만의 여성공동체가 병존하는 양상이라고 볼 수 있다.



Ⅳ. 결론

제주사회에는 이전까지 유지해왔던 독특한 문화가 있었다. 모계사회를 바탕으로 구성되었던 여성 중심의 문화는 창세신화를 지닌 설문대할망과 같이 여성 신 중심의 제주 신화를 창조하였다. 여성의 노동력이 중시되었던 제주 사회는 ‘해녀’라는 제주 고유의 직업형태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제주여성은 이러한 노동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수단으로 민간신앙의 주 행위자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여성의 책임과 의무가 동시에 존중받았던 제주의 민속은 타 지역과 구분되는 특유의 문화와 함께 여성 공동체문화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부계사회의 등장과 함께 중시되었던 유교사상은 제주에 낯선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여성 신들은 남성 영웅의 등장에 맞추어 그들의 신성이 격하되었고,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았던 해녀의 사회적 인식은 유교 속 여성성과 나잠어업의 형태로 인해 천시되었다. 제주 목사 이형상 역시 자신의 유교사상에 입각하여 유교식 국가의례를 제주에 이식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신당파괴를 진행했다. 이러한 모습은 기존 제주 사회와 내륙의 유교사회가 점차 대면하기 시작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내륙에서 내려오는 외부인의 경우, 기존 자신들의 사상에 입각하여, 제주 사회를 유교사회로 변모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제주의 여성 공동체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민속과 문화는 유교사상과 접목하면서 변용되었을지언정 제거되지 않았다. 제주의 민속신앙은 축소되긴 했으나 그대로 유지되어 여성 신의 이야기를 이어나갔고, 신당파괴 역시 이형상 파직 이후 다시 번복되었다. 해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점차 그 근면성과 강한 여성상으로 노동력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았다. 초알일별급은 유교제도에 제주 특유의 사회상이 반영됨으로써 제주도에 맞게 변형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고 남아 병존하는 양상을 보임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 지역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사회상은 당시 지역민들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문화적 형태 중 하나이며, 점차 사상의 이입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해나갔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여성 공동체가 각각의 측면에서 유교가 이입됨에 있어서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제주의 여성 중심 문화와는 어떠한 연관성을 보이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 글은 조선시대를 중심으로 제주 여성 공동체와 유교가 어떻게 병존하고 있는지를 연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주 내 모든 민속 문화를 언급할 수 없었다는 점과, 앞서 서술한 사례들은 제주 민속을 보여주는 사례 중 일부라는 점에서 자료상의 한계를 보인다. 하지만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제주 여성 중심 공동체 문화과 유교 사상이 대칭점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병존하고 있음에 주목하여 기존의 연구사를 바라보고, 적용시켜 재구성하고자 했다는 것에 그 의의를 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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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개요]

 

본 논문은 제주의 여성 중심 문화에 입각하여 제주 신화, 제주 해녀, 초알일별급 등에서 등장하는 여성의 공동체성에 주목하였다. 조선시기 제주여성은 사회적 역할까지도 포괄된 부담을 신앙을 통해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것은 제주 신화의 여성 신으로 등장하게 되었고, 이는 제주목사의 신당파괴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유지되는 모습을 보인다. 제주 해녀 역시 하나의 공동체로써 조선시대 역을 부담하는 것부터 항일운동을 진행하는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초알일별급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제주 여성 간의 전승으로 새로운 여성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당시 제주 여성이 만든 공동체가 유교 사상의 이입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도 전해오는 공동체성을 지니고 있다 유추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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