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의 침묵은 곧 권리의 포기…
힘찬 목소리 내는 봄이었으면

문 만 석

미래발전전략연구원장ㆍ법학박사

햇살 좋은 곳에서는 벚꽃이 벌써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는 요즘이다. 그늘과 양지의 시간이 다르게 흐르는 듯 햇살은 벚꽃의 개화도 조절하고 있다. 꽃이 피는 게 무슨 대수라고, 해마다 봄이 오면 마음이 설레는 걸까. 꽃향기가 매캐한 시절이 있었다. 꽃은 흐드러지고 매운 연기와 함성과 눈물이 어우러진 교정, 봄은 춘투라고 불리는 무언가와의 투쟁과 함께 왔었다. 투쟁의 대상이 무엇이었건 봄은 그렇게 소란스럽게 왔었다.

침묵의 봄이다. 1년 이상 지속되는 코로나19, 벚꽃 피는 순서대로 대학이 망한다는 인식의 현실화, 그리고 지독히도 끈덕진 청년 실업 등 봄을 노래할 수 없게 하는 현실의 무게가 무겁다. 중앙과 지방정부의 여러 정책과 지원에도 불구하고 정작 청년의 삶이 나아지는 징후는 보이지 않는다. 이 봄이 청년 세대에 더 가혹한 이유는 봄의 생동감과 푸르름이 청년의 절망과 우울과 맞물려 아프게 결합되기 때문이다. 

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받지 못한다. 독일 법학자 루돌프 폰 예링의 유명한 법언이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를 침해당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누군가가 대신 내 권리를 보호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청년이 지켜야 하는 권리는 무엇일까. 헌법 제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행복을 추구할 권리의 바탕이 되는 권리가 자기결정권이다. 자기결정권은 일정한 사적 사안에 관하여 국가의 간섭 없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로서 자기 운명 결정권이라고 할 수 있다. 현 시대 청년은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있을까. 청년이 주체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창하지 않는 한, 청년은 여러 정책과 수혜의 대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청년의 침묵은 곧 권리의 포기이고, 보호받지 못하는 잠을 자는 것이다.

자기의 목소리를 내는 봄이었으면 한다. 청년의 특권은 시대와의 불화와 저항정신에 있다. 청년은 불의에 분노하고, 불공정에 대항하며, 눈을 감지 않고 시대와 호흡하여야 한다. 청년의 삶은 책에서 얻는 죽은 지식이 아니라 삶에서 깨닫는 산 지혜를 익히고, 도전하고 시도하는 열정이 있는 삶이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이루어 내는 일은 인고의 고통을 필요로 한다. 봄의 꽃 한 송이도 우연히 피어나지 않는다. 꽃은 자신의 온 힘을 다해 영양분을 공급한 후 색 바래고 초라해진 낙엽, 그 낙엽이 뿌리에 쌓여 썩어 문드러지면서도 겨우내 그 뿌리를 보호하며 양분을 공급한 부엽토의 포기하지 않는 희생 위에서 핀다. 

마음껏 넘어져라. 파릇한 잔디가 캠퍼스의 운동장에 새로이 푸르름을 더한다. 운동장의 잔디는 미관상 아름다움 때문만이 아니라 넘어져도 다치지 않기 위한 배려의 마음이다. 아마도 대학의 의의는 청년에게 잔디가 되어주는 교육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넘어져도 다치지 않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삶의 잔디가 되어주는 장소, 대학은 청년에게 마음껏 넘어질 수 있는 자유의 터전이어야 한다. 우리 시대의 청년이 불행한 것은 대학이 잔디가 되어주지 못하고 단지 취업을 위한 통과의례로 여겨지는데 그 원인이 있다.

마음껏 넘어질 수 있는 자유가 제한되고, 넘어지면 다시 일어설 수 없이 큰 상처를 입는 사회에서 청년에게 권리를 위한 투쟁에 나서라고 이야기하는 일은 공염불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회가 그렇다고 또 환경이 그렇다고 푸념한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 상황을 바꾸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가 4ㆍ3과 5ㆍ18에서 저 멀리 홍콩과 미얀마에서 보아야 할 것은 푸르른 신념의 힘이다. 신념이 담긴 투쟁은 사회를 변화시키고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제 침묵의 봄을 벗어나서 왁자지껄하고 의미 있는 투쟁이 있는 각자의 봄 속으로 걸어가자. 그 투쟁으로 내 권리가 온전히 쟁취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봄은 그래야만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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