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자뷔 아일랜드』/이재/종이울림/201

제주 BOOK카페 <12>

이재와 나는 이십 년 전에 대전에서 만났다. 나는 눈사람이고, 이재는 낮귀신발이었다. 시를 좋아하는 인터넷 사이트에서 닉네임으로 말을 주고받다가 서로 통하는 게 있다고 느껴 대전역에서 만났다. 나는 그때 역 근처 고시원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고시원에서 밤새 문학과 영화와 음악 얘기를 했다. 그 우정이 지금까지 이어질 수 있었던 건 시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나는 한 작은 문예지 신인상을 받으며 시를 쓰기 시작했지만, 이재는 그 전부터 들고 다니던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이재는 사과 관련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해외 출장이 잦았다. 덕분에 그는 외국 사진을 많이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시회도 하더니 사진집을 준비하게 되었다. 마침 나는 독립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그 출판사에서 사진집을 내겠다고 이재가 내게 말했다. 

이재로부터 받은 사진들 중 반 이상이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가 제주도를 좋아하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언제 이렇게 많은 제주도 사진을 찍었는지 놀라웠다. 그런데 더 놀라운 점은 분명히 제주도 같은데 그 제주도 풍경이 이상하게 낯설게 다가왔다. 아니나다를까 그는 사진집 제목을 ‘데자뷔 아일랜드(DEJA VU ISLAND)’로 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 암스테르담, 파르마 등지에서 찍은 사진이 제주도 같고, 제주도에서 찍은 사진은 다른 나라 같다. 사진집 제목과 딱 어울리는 지점이다. 그는 낯익은 곳도 사진으로 낯설게 만드는 재주를 지니고 있다. 분명히 내가 가봤던 곳인데 그의 사진을 통해 보면 낯선 장소가 된다. 그는 무엇을 본 것일까. 그는 그 장소에 있는 시간, 기후, 분위기, 음악, 대화 등을 다 담아낸다. 우리가 시각으로 세상을 볼 때, 놓쳐버리는 것들을 그는 사진을 통해 완성한다. 

이재는 주로 흑백 필름으로 사진을 찍는 사진가이다. 그러면 당연히 필름 값이 많이 들 텐데, 그래도 흑백 필름을 놓지 못한다. 수동 카메라로 사진을 찍으면 더 집중하게 된다고 이재는 내게 말한 적 있다. 이재는 카메라로 시를 쓰는 사람이다. 나는 그의 사진에서 시를 본다. 그의 사진이 낯설게 보이는 건 그가 시를 썼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에 어느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대전에서 만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가 머무는 대구의 한 원룸에 갔다. 그의 집에는 고양이와 카메라와 롤랑 바르트의 책 『카메라 루시다』(열화당, 1986)가 있었다. 셋만 있으면 충분해 보였다. 자정 무렵, 셋이 이상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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