셜리 발렌타인.

  그녀의 이름이다.

  ‘셜리 발렌타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그녀의 입가에는 행복이 가득하다. 그녀가 누구의 아내, 누구누구의 엄마일지라도, 그녀는 셜리 발렌타인이다.

  그러나 셜리 발렌타인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내기까지 그녀는 오랫동안 고정된 틀 안에서 외로운 나날을 보낸다. 매일 벽과 이야기하는 그녀. 벽은 유일한 그녀의 말동무이다. 남편도 자식도 그녀의 지친 마음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녀가 늘 그 자리에서 늘 하던대로 식사를 준비하고, 설탕 뿌린 아이스크림을 만들어주길 바란다.

  그녀는 남편이 돌아올 시간이면 언제나처럼 식탁 가장자리에 찻잔을 놓아야 하고, 목요일 저녁이면 반드시 고기요리를 준비해야 한다.

  사랑이라는 말로 철저히 무시되어지는 것들. 그녀의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에게 결코 친절하지 않다. 그는 아내가 아닌 타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건넨 적이 없는 타인에게 상냥한 웃음과 다정스런 제스처를 취한다.

  그러나 텅 빈 집, 거울에 비친 그녀는 마흔 다섯의 셜리 발렌타인일 뿐이다.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의 저녁식사를 위해 사온 고기를 옆집 사냥개에게 던져준다. 그리곤 친구 제인이 건넨 그리스행 비행기표와 함께 2주일의 여행을 위한 짐을 꾸린다. 벽 너머의 세상이 낯설고 두렵지만, 그녀는 용기를 내어 셜리 발렌타인을 찾기 위한, 아니 기억해내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따가운 햇살, 맨발로 걷는 모래사장과 끝없이 펼쳐진 바다. 이 모든 게 그녀에겐 생소하다.

  그러나 그녀에게 그리스는 변화이고, 새로운 시작이다. 그녀의 늘어진 아랫배는 더 이상 볼품없거나 초라하지 않다. 자유로운 몸짓 속에서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그녀의 일부이다. 파라솔 아래 앉아 해질녘의 바다를 바라보는 그녀에게서 이제 외로움은 찾아볼 수 없다.

  그녀는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지 않는다. 그녀는 비로소 셜리 발렌타인을 찾았고, 그녀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를 찾아온 남편에게 미소를 머금은 채 말한다.

  “전 한 때 아내였고, 엄마였어요. 하지만 이제 다시 셜리 발렌타인이 되었답니다. 같이 한 잔 하시겠어요?”

  수많은 그녀들의 잊혀져 가는 이름들. 촉촉하게 젖은 셜리의 주름진 눈가를 보고 있는 내내, 그녀들의 이름을 한 번씩 따뜻하게 불러주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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