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커먼 하늘 위로 한 순간 번쩍이는 미제의 불빛이 지구 저편에서 굉음을 토해낸다.
야심 없고 도덕적인, 훌륭한 것이 전쟁이었다. 두려움과 공포 이상의 체념적 공황상태에 빠져있는 이라크 인들에게, 반전평화를 외치는 전 세계 인간방패들에게 ‘해방군'은 그렇게 찾아왔다.
최첨단을 자랑하는 기계 음과 인간 내면의 공포 음이 요동치던 그날 밤, 오늘 지구 이편에서는 다만 파장을 달리하는 파열음이 사납게 귀를 때린다.
일상의 웃음소리와 낮은 속삭임들. 봄날의 캠퍼스는 싱그럽다. 폭주하는 외신을 다만 신기한 냥 접할 뿐, 일상의 리듬은 흐트러짐이 없다. 실시간 전파를 타고 쏟아지는 ‘워-게임'은 할리우드 영화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인가.
전쟁은 그다지 자극적이지 못했다. 무관심과 외면은 또 다른 범죄행위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혹은 철저히 부정한 채.
이어 미국의 행동을 주목하고 분석해야 한다고 한다. 사태의 심각성에 긴장하자 한다. 핵과 미사일과 인권유린의 ‘조건이 적절히 충족된', 해서 이라크 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로 취급됐던 북한이 미국의 다음 ‘포획 대상'이라는 진단이 제시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평화의 외침은, 지금 너무도 간절한 ‘정의'라는 인류의 가치는 그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게 될 즈음에나 기대해볼 수 있게 되는가. 미사일이 포진되고 이북 땅에 성조기가 꽂히게 될 상황에야 미국의 일방적인 군사적 패권주의에 우리가, 세계가 농락 당하고 있음을 인식할 것인가. 그때 비로소 정의라는 이름으로, 반전의 구호로 거리로 나설 것인가. 북의 동포 형제들의 눈에 공포 이상의 그 무엇을 서리게 해서는 아니 된다며 목소리를 높일 것인가.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원한다"라고.
허나 그 외침이, 그 절규가 내포하고 있을 기회주의적 이중성에는 뭐라 답할 참인가. 뒤따르는 도덕적 부담감은, 정의에 대한 부채는 어찌할 것인가.
인류의 양심을 저버리고 평화를 파괴하는 지금 침략자의 군사행동에 스스로 말과 사고와 행동을 무의식 속에 차단해 버리는 모습에서 새삼 그들과 다를 게 없어 보이는 우리가 지금 너무도 적나라하게 노출돼 있다. 철저히 학습화된 침묵에의 동조, 너무도 이기적인 자기방어적 속성. 이라크 파병의 대가로 대북 문제에 관한 한미 의견 차를 좁힌 것이 그네들이 주장하는 국익이라면, 설령 다가올지 모를 한반도 평화는 중동에서 건져 올린 전리품 이상이 결코 아니다.
침묵하는 우리는 오늘 이 사태에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우리의 대학 지성은, 우리의 젊음은 훗날 역사의 물음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물가가 오르고 경기는 더 어려워졌다. 취업문은 좁아질 것이고, 해외 어학연수 계획은 다음을 기약해야 할지 모른다. 비로소 전쟁을 느끼게 된다.
따사한 봄 햇살이 교정 가득 내리쬐던 3월의 어느 날, 우리는 그렇게 비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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