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엄밀하기보다는 오히려 올바르기만을 원한다.”

  이 말은 윤리학자의 말이 아니고, 우리 시대의 위대한 과학자들 중의 한 사람인 스티븐 호킹이 한 말이다.

  호킹은 ‘엄밀하기’를 추구해왔던 자신의 연구 방식을 바꾸어 1970년대 초 이후에는 95%의 정확성으로 만족한 채 ‘올바르기’에 더 큰 비중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호킹이 연구 방식을 전환했다는 이 사실이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우주가 관찰자인 인간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아인슈타인과 관측 장치의 선택을 통해 인간이 우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참여하게 된다는 닐스 보어 사이의 28년에 걸친 논쟁이 후자의 승리로 끝나고, 1920년대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가 확립된 이래로 자연과학에서도 객관성의 신화는 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말을 다시 되새기게 되는 것은 절차로서의 ‘윤리’보다는 결과로서의 ‘과학’을 중시하는 성과중심주의가 만연해 있는 우리의 현실 때문이다.

  ‘윤리로 과학의 발목을 잡지 말라’는 내용의 짤막한 기사를 접한지 한 달여밖에 지나지 않은 11월 21일, 우리는 황우석교수가 노벨상을 놓칠까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외국의 한 일간지는 11월 19일자에서 “한국은 소문과 험담으로부터 영웅을 보호하려 한다”는 주장까지 했다고 하는데,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황 교수와 공동으로 논문을 집필한 정보과학기술보좌관이, 지난 13일 제럴드 새튼 교수가 황교수와의 공동연구협력 ‘결별 선언’을 한 직후에도 계속 황교수를 옹호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황교수는 우리나라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지도 받고 있다. 21일자의 한 신문에 의하면, 10월 19일 ‘세계줄기세포허브’ 개소식에서 한 즉석연설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은 “생명윤리에 관한 여러 가지 논란이 훌륭한 과학적 연구와 진보를 가로막지 않도록 잘 관리해 나가겠다”고 밝혔다고 한다. 준비된 원고에서는 “사회의 상식과 양심에 의해” 과학기술을 “관리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면서 “정부는 생명윤리의 바탕 위에서 생명과학연구가 큰 발전을 거둘 수 있도록 관리와 지원에 만전을 기해 나갈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생명윤리보다는 생명과학연구의 발전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준비된 원고를 바꾸어 오히려 후자를 강조한 즉석연설의 내용은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병원의 임상연구에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국제적인 연구윤리 관행”과는 사뭇 다른 것이어서 특히 이채롭다.

  노벨상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국제사회에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 과학자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 전제조건이 하나 있다. 국제적인 연구윤리 관행을 준수해야 한다. 한국적인 상황의 특수성을 이해해주지 않고 서구의 잣대만 들이대는 것을 억울해하는 황 교수 연구팀 관계자의 반응을 “매우 염려스러운 반응과 대응”이라며 “국제적인 연구윤리 관행을 황 교수팀을 비롯한 국내 과학자들이 무시한다면 세계 과학계의 따돌림을 받을 것”이라고 한, 황교수 관련 파문을 일으킨 제럴드 섀튼 교수와 미국 피츠버그 의대 이형기 교수의 경고를 경청해야 한다.

  연구절차의 윤리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과학은 결코 ‘좋은’ 과학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나치의 전범 처리 과정에서도 이미 명백히 드러났다.

  ‘취약한 피험자’인 연구원을 임상시험 등에 동원하지 않는다는 등의 국제학계에 통용되는 윤리규범 준수여부가 명백하게 밝혀지게 되고,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으면 책임을 짐으로써 국제사회에서 후속 과학자들의 발목이 잡히는 일이 없게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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