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즐거움을 위해 어르신들에게 늘 준비돼 있던 옛날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한국의 역사가 단순한 과거로 치부된 하나의 예라 할 수 있다. 이렇듯 별개의 문제를 가지고 논의를 시도할 만큼 한국의 옛모습은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는 현대적 철학과 달리, 역사 속에 묻혀버린 옛날이야기가 될 수 없다.

  그중에서도 명성황후에 대한 평가는 이야기의 진실성 혹은 인물평가에 있어서 적지 않은 논란이 되고 있다.

   명성황후는 1851년 철종 때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다.

  8세에 부모를 여의고 흥선대원군의 부인 민씨의 천거로 왕비에 간택돼 1866년 고종과 가례를 올리고 입궁했다.

  흥선 대원군은 외척의 권세 위험이 없는 소녀 민씨를 왕비로 들여 왕실과 정권의 안정을 도모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왕비 민씨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출중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왕비에 오른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왕실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그래도 여성이 우뚝 설 수 있는 ‘대궐 안에서의 그녀’로 인해 나타났던 모습은, 현대사회가 차츰 다가서고 있는 ‘여성중심사회’의 어설픈 표본이었다. 민비가 중전으로써 자신의 역할을 했던건, 과도했지만 나름대로 충실해 보였던 내조였다. 그녀가 그 틈새에서 남몰래 품어왔던 권력의 정상, 즉 ‘민비상위시대’는 성공시켰다고 볼 수 있 지만 권위 아래 마음껏 누릴 수 있던 그녀만의 술수는 현명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듣기도 한다.

  그녀의 계속된 정치관여로 인해 결국 세자책봉문제로 대원군과의 사이가 악화됐고 그 이후 그녀는 끊임없이 그를 정계에서 밀어내려 했다. 마침내 민비는 탄핵상소를 이끌어 내어 1873년 대원군은 실각하게 된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그녀는 민씨 척족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는 등 개화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1

  1882년 민씨세력의 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위정척사파와 대원군 세력이 봉량미 문제로 임오군란을 일으켜 그녀를 죽이려 했으나 그녀는 재빨리 궁을 빠져나와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에 피신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고종과 접촉해 청나라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그녀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국군이 대원군을 납치해 청나라로 끌고 감으로서 위기를 넘겼다.

  그 사건 이후 그녀는 친청 정책을 실시했는데, 이 때문에 개화파의 불만이 높아져 갑신정변이 일어나고 일시적으로 개화당의 정권을 장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때에도 민씨는 청국군의 도움으로 다시 정권을 되찾는다.

  이 때부터 그녀는 외교에 눈을 뜨고 매우 민첩한 외교 능력을 발휘했다. 1894년 동학교도를 중심으로 한 농민봉기가 일어나 조선의 정국이 혼미상태가 됐을 때, 조선에 적극적인 공세를 펼치던 일본은 갑오경장에 관여하면서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그녀의 세력을 제거하려고 했다.

  이 때는 이미 영국, 독일, 러시아 삼국의 간섭으로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실추된 상황이었기에 그녀가 펼쳤던 친러정책은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이에 일본공사 미우라는 조선에서 밀려날 것을 염려한 나머지 일부 친일 세력과 짜고 민씨를 포함한 친러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을미사변을 일으킨다. 1895년 일본 군인과 정치낭인들이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를 시해하고 폐비한 뒤 정권을 탈취한 사건이 그것이다.

   상궁과 같은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민비를 찾을 수 없었던 일인들은 민비로 생각되는 여성 들을 닥치는대로 죽였다. 눈가 주위에 희미한 수두자국이 있다는 것으로 명성 황후의 신분으로 확인된 시체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차마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가혹 행위를 당한 뒤 아소정 주변에 던져저 불태워졌다.

   얼마전 새롭게 밝혀진 사실에 의하면 일제 강점기 때 일제는 아예 명성황후시해장소였던 건천궁을 없애고 화단을 꾸미려 하였다가 3.1운동으로 항일 운동이 거세지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해 10월 10일 그녀는 복위되어 태원전에 빈전이 설치되고 국장에 의해 숙릉에 안치됐다. 1897년 명성황후로 주책되고, 11월 양주 천장산 아래에 이장되어 흥릉이라 했고 1919년 고종이 죽자 2월에 미금시로 다시 이장됐다.

  2002년 월드컵은 한국과 일본이 공동으로 개최한다. 이에 민족의 자긍심을 되찾고 식민지의 산물인 민비로의 격하를 바로 잡을 의도 아래 역사드라마로써 단장돼 보여지고 있다.

  드라마에서 보여지는 그녀의 모습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국모를 시해할 수 밖에 없었다”는 당시 일본 총리대신인 이또오의 탄식처럼 위대한 모습이 함축돼 있다.

  그녀는 분명 우리나라의 근세사를 망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가문을 내세워 권력을 이용했으며 사치와 방탕을 일삼았고 미신을 통한 푸닥거리로 국가재정을 축냈다. 또 주관없는 왕을 마음대로 휘둘렀고 특히 고부간의 권력 다툼을 통해 나라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임오군란과 동학 때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려 몸부림친 것은 지탄을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하며 정치적 역량을 지녔던 조선시대 최후의 여류 정치가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결국 일인들의 손에 의하여 비참하게 시해됨으로써 파라만장한 삶을 마감하는 명성황후. 우리가 느끼는 치욕은 명성황후의 가증스런 모습이 아니다. 심판을 하고 죄를 내리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를 일본 낭인들이 시해한 것은 국가권력을 날치기 한 것이요, 나라대 나라로서 도리가 아니다.

  이 사진은 1902년에서 1903년까지 서울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테’의 <꼬레아 꼬레아니>에 실려 있다. 오랫동안 명성황후 얼굴로 공인돼 왔던 사진이지만 얼마 전 부터 진위여부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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