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수의학과 교수 ©
서울에서 개업하고 있던 거의 20여년 전의 일로 기억된다. 점심시간 즈음이었는데 50대 중반정도 되신 어떤 아저씨가 개 한 마리를 데리고 병원에 들렀다. 그 당시에 그 시간이면 대부분이 동물병원을 방문하는 사람은 주로 주부들이었기에 오히려 내가 궁금하여 어찌 바쁜 직장의 시간을 쪼개어 아픈 개를 몸소 데리고 병원에 방문하셨는가 하고 질문하였다. “술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마누라는 잔소리하고, 자식들도 자기들 공부하랴, 반기는 사람하나 없지만, 이 개는 골목 귀퉁이에 들어서기만 하면 어떻게 알았는지 반갑게 ‘컹컹’ 짖어대면서 대문을 열고 들어와 쓰다듬어주고 집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항상 변함없이 반겨주기에 나는 이 개가 우리 식구들 중에서 제일 좋습니다. 술을 먹고 들어오던, 맨 정신으로 들어오던 얘는 늘 나를 반겨준답니다.”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아픈 동물을 치료해주면서 동물에게 헌신적인 경우를 많이 봐오지만 아직도 그 아저씨가 기억에 오래 남아 있다. 현대의 핵가족화에 식구들에게 외면당하고 있는 중년의 쓸쓸한 일면이라는 생각도 들게 된다.

식구들과 같이 지내는 동물을 우리는 애완동물이라고 불러왔다. 원래 애완동물(愛玩動物)의 사전적인 의미는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다루거나 보며 즐기는 동물을 뜻한다. 198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인간과 애완동물의 관계를 주제로 하는 국제심포지엄에서 사람과 더불어 사는 동물로 동물이 인간에게 주는 여러 혜택을 존중하여 애완동물을 사람의 장난감이 아니라는 뜻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동물로 반려동물(伴侶動物; companion animal)이라고 개칭하여 처음으로 제안되었다. 즉, 우리와 함께 지내는 동물에게 피동적인 의미에서 능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일방적인 형태에서 양방향적인 형태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반려동물이라는 명칭이 어색하다고 생각되지만, 우리는 배후자를 ‘인생의 반려자’라는 표현을 자주 하는데 그런 의미로 격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반려동물의 대부분이 개가 차지하고 있다. 개는 특성상 무리지어 사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즉, 서열이 있고 철저하게 서열에 의하여 역할이 나누어지게 된다. 일단 강아지 때 분양받아서 한 식구 내에 속하게 되면 자기보다 높은 서열의 식구들에게는 충성하고, 집단 내에서 서로 장난치며 놀기 좋아하고 또한 자기집단(식구)을 보호하려는 본성을 가진다.

어떤 집에서는 강아지 때부터 교육을 잘못시켜서 식구들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데 올라 있는 경우도 가끔씩 볼 때가 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집의 식구들 중에 서열이 가장 꼴찌에 만들어 놓는 것이다. 이것은 강아지 때부터 식구들끼리 간단한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 가장 힘이 약한 어린이들이 서열을 뺏기기 쉬운데, 개에게 주기적으로 음식을 주거나 같이 놀아주면서 모든 주도권을 사람이 갖도록 해야 한다. 목줄을 매서 걸어다닐 때 사람보다 앞서서 걸어가지 못하도록(개에게 끌려다니는 것은 절대 좋지 못하다) 처음부터 훈련시키고 적어도 ‘앉아, 엎드려, 기다려’와 같은 간단한 훈련을 먹이를 매개로 하여 반복시켜 훈련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훈련이 되어 있으면 위험한 상황에서도 쉽게 모면할 수 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은 가족의 구성원이 하나 더 생기는 것을 의미하고, 식구가 하나 더 늘어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이에 따른 의무도 생기게 된다. 즉, 인간보다 수명이 짧기에 어쩌면 생로병사까지도 책임을 져야한다. 간혹 집의 어린이가 개의 생로병사를 빨리 경험함으로써 굉장히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시간을 두고 본다면 인생경험을 대신 겪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요즘은 이런 의무를 저버리며 길거리에 반려동물을 내다 버리는 경우를 보거나 반려동물을 학대하는 경우를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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