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치완 철학과 교수

소통(疏通)은 ‘막힌 것 없이 트여서 오가는 데 거침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말사전에서는 이 말을 ‘막히지 아니하고 잘 통함’, ‘뜻이 서로 통하여 오해가 없음’이라고 풀이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소통이라고 번역하는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

on)이라는 말의 어원을 보면 뉘앙스가 약간 다르다. 왜냐하면 쿰(cum; with)과 모니스(monis; bound), 또는 쿰(cum)과 오이노스(oinos; one)라는 어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막힌 것이 없이 잘 통하는 것’과 ‘한 데 묶는 것’은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하나의 말을 맥락 속에서 읽어내지 못하는 것은 오류(誤謬)다. 그러므로 소통(疏通)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말의 차이에 집착하는 것도 병(病)이라면 병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 소통도 커뮤니케이션도 다 좋은 말이다. 그런데도 그 말이 삐딱하게 들린다는 건, 그 사람이 삐뚤어진 탓이다. 하지만 요즘 소통의 쓰임새를 보면 ‘그 몹쓸 사회가 왜 소통을 권하는고!’라는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한다.

정작 굳건한 벽(壁)을 쌓고서 말로만 외치는 소통, 결국 자기에게 동의하기를 요구하는 일방 통행식의 커뮤니케이션만 있기 때문이다.

‘말마디나 한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소통’부터 말하는 사회다. 대중의 표가 필요한 선거철의 정치인에서부터 그런 정치인의 위선에 넌덜머리를 내는 지식인까지 입만 열면 소통이다. 하는 말들도 고상하다. ‘생각하는 것들이 달라서’라고 해도 될 것을, ‘소통이 부재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소통 부재’의 책임은 언제나 ‘너에게 있다’고 진단하고, ‘그러니까 너부터 마음을 열고 나와 한 데 묶이자’고 요구한다. 결국은 불화(不和)한 채로 말이다. 이게 시쳇말로 ‘파쇼적(fascio的) 동이불화(同而不和)’다.

청나라 사람 장호(張湖)는 ‘꽃에는 나비가 없을 수 없고, 산에는 샘이 없어서는 안 된다. 돌에는 이끼가 없을 수 없고, 물에는 물풀이 없어서는 안 된다. 교목(喬木)에는 덩굴이 없을 수 없고, 사람에게는 ‘벽(癖)’이 없어서는 안 된다.(花不可以無蝶 山不可以無泉 石不可以無苔 水不可以無藻 喬木不可以無藤蘿 人不可以癖)’라는 글을 남겼다. 그리고 박제가(朴齊家)는 ‘사람이 벽이 없으면 버린 사람일 뿐이다.

대저 벽(癖)이란 글자는 병이란 글자에서 나온 것이니, 지나친 데서 생긴 병이다. 그러나 홀로 걸어가는 정신을 갖추고 전문의 기예를 익히는 것은 이따금 벽이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다.(人無癖焉 棄人也已 夫癖之爲字 從疾從彼僻 病之偏也 雖然具獨往之神 習專門之藝者 往往惟癖者能之)’라고 말한 바 있다.

벽(癖)에 대한 이야기는 ‘미치지 않으면(不狂) 미칠 수 없다(不及)’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보면 벽(癖)은 자신의 정체성 찾기이고, 고집과 투쟁이며, 인문학적 생명력의 원천이다. 통섭(統攝, Consilience)도 좋고, 소통도 좋다.

하지만 벽(癖)을 전제로 하지 않은 통섭과 소통은 천박한 정치 구호에 불과하다. 소통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나와 남의 벽(癖)을 인정하고, 그래서 떳떳해야 한다. 그런 다음, 남을 속이지 않는지, 그리고 누구보다도 자기를 속이지 않는지를 반성해야 한다. 개방성을 의사소통의 제일원칙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반성 없는 소통의 요구, 원칙 없는 소통의 강제. 그래서 나는 소통이 싫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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