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들, 미군철수ㆍ평화운동 지속 전개

▲ 카데나 공군기지 앞에서 오키나와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취재팀이 시위하는 주민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일본열도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태평양상에서 만나는 섬 오키나와. 일본 본토보다 대만이나 필리핀에 더 가깝다고 느껴지는 오키나와에선 ‘일본 속의 또 다른 일본’을 만날 수 있다.
 
오키나와는 통일왕국이 건국된 1429년부터 일본에 통합됐던 1879년까지 450년간 일본과는 전혀 독립적인 류큐(琉球)왕국이 있던 곳이다. 15~16세기 대교역시대에는 명ㆍ조선ㆍ일본과 활발한 대외 무역활동을 전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후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쓰마(가고시마현) 지방 무사 시마즈 요시히로가 1609년 침략해 정복했다.
 
이후 류큐왕국은 1872년 류큐번으로 격하되고, 1879년 군대와 경찰을 동원한 일본 정부에 의해 국왕이 폐위된 뒤, 오키나와현으로 개칭됐다. 1945년 패전 이후에는 미군 점령 아래에 있다가 1972년에야 일본으로 복귀했다.
 
류큐인들은 일본어와는 다른 언어를 갖고 있었다. 오키나와인들은 “멘소레(어서오세요)” “하이사이(안녕하세요. 남자의 인사. 여자의 인사는 ‘하이타이’)” “니페데비드(감사합니다)” “낭크르나이사(어떻게든 잘 되겠지. 체념)” 등 현대 일본어와는 많이 다른 언어를 쓰고 있다. 한국어와 제주어의 차이보다 더 큰 차이를 보이는 방언이라고 한다.
 
‘평화의 섬’ 오키나와가 ‘기지의 섬’이 된 것은 일제가 동아시아를 침략하면서부터다. 태평양전쟁 말기 오키나와 전투에서 민간인 9만여명과 그보다 더 많은 일본군인들이 죽었다. 그때 1만여명의 조선인들도 희생당했다고 한다. 이후 미군기지들이 오키나와를 뒤덮게 되는데, 미군은 오키나와 상륙 직후부터 요미탄과 가데나 기지를 점령해 단기간에 확장ㆍ정비하고, 남부 전선의 군사 작전, 일본 본토 폭격, 군수물자의 수송 등을 위한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1960년 미-일 ‘안보개정’ 때 일본 본토의 미군기지는 4분의 1로 줄었으나 오키나와에선 오히려 2배로 늘었다. 1972년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된 뒤 일본 국토 면적의 0.6%에 지나지 않는 이곳에 주일 미군기지의 75%가 집중된 것이다. 오키나와는 현재 동아시아 주둔 미군의 후방 보급기지 구실을 하고 있다. 맥아더가 오키나와를 ‘우리의 천연국경’이라 했듯이, 미국에게 오키나와의 중요성은 더욱 강조되고 있다.
 
현재 오키나와 미군기지의 규모는 전체 면적의 10%를 넘는다. 기지의 편의성을 가장 중시하는 미국의 입장은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군기지 속에 오키나와가 있다’는 말로 축약된다. 오키나와 가데나시의 83%는 미군기지가 차지하고 있고, 가데나 미 공군기지의 활주로는 4㎞에 달한다. 전투기나 폭격기가 이착륙할 때 굉음이 엄청나 지역주민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오키나와에는 또한 후텐마 미군기지가 있다. 이 후텐마 기지를 다른 지역으로 옮기는 문제는 예민한 정치문제이다. 후텐마 미 해병대 기지를 폐쇄하고 북부의 헤노코에 신기지를 건설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15년 넘게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후텐마 기지의 이전 문제는 1995년 오키나와 주둔 미군에 의한 성폭행 사건부터 촉발돼 2004년 이후 주일미군 재편의 핵심사항으로 부각됐다. 2차 대전 종전과 아울러 미군기지가 들어섬에 따라 오키나와에서는 꾸준히 미군철수 운동이 벌어졌고, 풀뿌리 차원의 평화운동도 전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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