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적지 보존 통해 고난의 역사 현장 한눈에
젊은 세대에 평화의 중요성 일깨

▲ 구 해군사령부는 450m에 달하는 굴을 곡괭이로만 팠다. 구 해군사령부 내부에는 당시 일본군이 사용했던 회의실, 작전실 등이 있다.
카카즈 고지(코타이) 공원은 오키나와 기노완 시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오키나와 전쟁에서 일본군이 방어를 하던 장소였다.  그러다보니 이곳에는 오키나와 전쟁의 흔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일본군이 지은 토치카(두꺼운 철근 콘크리트와 같은 것으로 공고하게 구축된 구축물)와 동굴 등을 볼 수 있다.

오키나와 전쟁 초기에 일본군과 미군은 가가쓰 고지에서 대규모의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가가쓰 고지가 주변의  시야가 모두 보이고 근처에는 방어막이 될 수 있는 건물들이 즐비해 있어 최적의 수비 장소로 판단했다. 일본에게는 이 고지를 뺏긴다면 막대한 손실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이 고지를 점령하지 못한다면 오키나와는 물론이고 태평양 전쟁에서도 불리해질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카카즈 고지에서 대규모 전투가 일어났다.
 
카카즈 고지에서 일어난 첫 전투는 일본군이 압승을 거뒀다. 지리적 이점뿐만 아니라 전투용품, 식량 등을 미리 대비를 해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군은 공군력을 투입해 이곳을 빼앗았다. 카카즈 고지에 있는 토치카에는 구멍이 폭격의 증표다. 그 구멍은 폭격이 얼마나 심했는지를 알려준다.
 
▲ 카카즈 코타이 공원에 설치된 전망대에서는 후텐마 기지를 바라볼 수 있다.

현재 카카즈 고지는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공원에는 토치카 등 전쟁의 흔적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이와 함께 전망대, 추념비 등도 세워져 있다. 전망대에서는 후텐마 기지를 바라볼 수 있다. 또 약간만 시선을 돌리면 밀집된 주택가가 보인다. 오키나와 주민들이 미군기지와 근접하게 사는 것을 알 수 있다.
 
▲ 카카즈 코타이 공원에는 오키나와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한국인을 위해 ‘청구의 탑’라는 위령탑이 설치돼 있다.

추념비도 많다. 이 중에서도 특이한 점은 오키나와 전쟁에 돌아간 한국인을 위령하는 ‘청구의 탑’(靑丘之塔)이 있다는 것이다. 청구의 탑은 1971년 일본민주동지회에서 만들었다. 청구의 탑을 만들기 위해 일본민주동지회는 일본 우익세력에게서 대부분 모금을 받았다. 청구의 탑의 내용에도 한국인 전사자를 애도하려는 의미가 아니라 전사자를 전쟁 영웅으로 미화시켰다. 일본은 반성하지 않고 전쟁의 계속 미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카카즈 고지 공원에서 바라본 오키나와는 오키나와를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였다. 앞에는 후텐마 기지가 있고 옆에는 주택가가 있으며 뒤편에는 나하 공항과 바다가 보였다. 오키나와의 기지, 주민, 관광지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다. 주택가와 기지를 한 눈에 보면서 오키나와 주민들이 매일 기지에서 나오는 굉음을 듣는 자체가 얼마나 스트레스가 될지 생각했다.
 
또한 전쟁이 일어났던 곳을 공원으로 조성하면서 평화의 중요성을 더 느낄 수 있게 해줬다. 평화라는 것은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적지를 어떻게 활용하느냐도 중요하다. 카카즈 고지 공원처럼 추모비를 만들면 전쟁으로 인해 돌아가신 분들을 생각하게 되고 전쟁의 아픔을 더 상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 해군사령부는 도미구스쿠 시에 위치한 방공호다. 오키나와 전쟁에서 일본 해군을 총 지휘하던 장소였다. 깊이는 약 20m이며 방공호의 넓이는 총 450m이다. 현재는 275m만 개방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곳에서 일본군 4000여 명이 자살했다. 지금도 구 해군사령부에는 자살을 하기 위해 쓴 수류탄의 자국히 남아있다. 현재 개방된 275m는 시신의 발굴이 끝났지만 개방하지 않은 구역에서 계속 시신이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구 해군사령부 앞에는 기념품점이 있다. 이 건물에는 그 당시 사진이나 그림, 총, 총탄 등의 전쟁물품, 병, 손전등같은 일반용품들을 전시했다. 사진은 전쟁에 다친 아이들, 그들을 치료하고 있는 미군 등의 내용을 표현돼 있다. 구 해군사령부를 들어가는 입구에는 습기가 가득했다. 안으로 들어가면 회의실, 작전실 등이 있고 그 당시 생활상을 표현한 사진이나 그림이 전시돼 있다. 그 중에는 곡괭이와 땅을 파고 있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450m에 달하는 길이를 곡괭이로만 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해군사령부는 징병된 오키나와 주민들이 대부분 팠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간부들이 직접 굴을 팠을 리는 없기 때문이다. 그 당시 일본군은 오키나와 주민을 국민이 아니라 노예로 봤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굴을 일일이 곡괭이로 판 것보다 더 경악할 만한 것은 전쟁 말기에 4000여 명이 자살을 했다는 사실이다. 보통의 군대라면 전쟁에서 불리해지면 항복을 해야 하는데 일본군은 항복 대신 자결을 요구했다. 일본의 할복 문화라고 볼 수도 있지만 4000여 명 중에서는 징용된 군인들도 많았다는 점을 보면 말도 안 되는 처사다. 군대는 국민을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데 일본군은 오키나와 전쟁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만 충실했다. 이러다 보니 일본군에게 오키나와 주민들은 자신의 국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 오키나와 주민들은 일본군에 대해 반발이 심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구 해군사령부에서 일어난 행태를 봤을 때 일본은 전쟁에 미쳤다고 밖에 볼 수 없다. 전쟁을 통해 자신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물 안 개구리와 같다.
 
이 두 장소는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 곳에서 발견된 전쟁무기를 보면 미군을 상대할 수 있던 무기가 아니었다. 단지 징병된 사람들을 앞장세워서 전쟁을 진행했을 뿐이다. 그 당시 일본군은 한 나라를 지키는 수호대가 아니라 침략범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일본은 그 사실을 숨기는 데만 급급하고 있다. 오키나와에서 일본 정부가 만든 장소는 오키나와에서 자결한 사람들을 치하하는 내용도 있다. 이런 상황들을 볼 때 일본은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을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와중에서도 오키나와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기 위해 전적지들을 보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 대단하게 여겨진다. 김동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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