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지(편집국장)

얼마 전 서점을 찾아 시집을 고르던 중 박노해 시인의 시집을 골랐다. 온통 진홍색 빛으로 물든 시집이라 눈에 띄었다. 시집 이름은 ‘그러니 그대 사라지지 말아라’. 박노해(朴勞解)는 시인, 노동운동가, 평화운동가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1984년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은 당시 우리나라의 노동자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젊은 대학생들을 노동현장으로 뛰어들게 하면서 한국사회와 문단을 충격으로 뒤흔들었다.
 
그는 1991년 3월 구속 후 24일간 잔혹한 고문을 당한 끝에 국가보안법상 소위 ‘반국가단체 수괴’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98년 8월 15일, 김대중 전 대통령의 특별 사면으로 복역 8년만에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2000년부터 그는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지 않겠다’며 스스로 사회적 발언을 금기시한 채, 홀로 세계의 빈곤 지역과 분쟁 현장을 돌며 조용히 평화운동을 전개했다. 박노해 시인은 노동자의 시인, 사회의 진보를 추구하는 문인이라는 이미지만을 가지고 있던, 필자의 눈에 들어온 시가 하나 있었다. ‘넌 나처럼 살지 마라’라는 시다. 시는 다음과 같다.
 
“넌 나처럼 살지 마라/아버지, 술 한 잔 걸치신 날이면/넌 나처럼 살지 마라//어머니, 파스 냄새 물씬한 귀갓길에/넌 나처럼 살지 마라//이 악물고 공부해라/좋은 사무실 취직해라/악착같이 돈 벌어라//
 
악하지도 못한 당신께서/악도 남지 않은 휘청이는 몸으로/넌 나처럼 살지 마라 울먹이는 밤//내 가슴에 슬픔의 칼이 돋아날 때/나도 이렇게는 살고 싶지 않아요/스무 살이 되어서도/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고//
 
어머니, 당신의 소망은 이미 죽었어요/아버지, 이젠 대학 나와도 내 손으로/당신이 꿈꾸는 밥을 벌 수도 없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 그래요,/난 절대로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자식이 부모조차 존경할 수 없는 세상을/제 새끼에게 나처럼 살지 말라고 말하는 세상을/난 결코 살아남지 않을 거예요/
 
아버지, 당신은 나의 하늘이었어요/당신이 하루아침에 벼랑 끝에서 떠밀려/어린 내 가슴 바닥에 떨어지던 날/어머니, 내가 딛고 선 발밑도 무너져 버렸어요/그날, 내 가슴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공포가/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새겨지고 말았어요//세상은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그 어디에도 기댈 곳도 없고/돈 없으면 죽는구나/그날 이후 삶이 두려워졌어요//
 
넌 나처럼 살지 마라/알아요, 난 죽어도 당신처럼 살지는 않을 거예요/제 자식 앞에 스스로 자신을 죽이고/정직하게 땀 흘려온 삶을 내팽개쳐야 하는/이런 세상을 살지 않을 거예요/나는 차라리 죽어 버리거나 죽여 버리겠어요/돈에 미친 세상을, 돈이면 다인 세상을// 아버지, 어머니, 돈이 없어도 당신은 여전히 나의 하늘입니다/당신이 잘못 산 게 아니잖아요/못 배웠어도, 힘이 없어도,/당신은 영원히 나의 하늘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다시 한 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나는 없이 살아도 그렇게 살지 않았다고/나는 대학 안 나와도 그런 짓 하지 않았다고/어떤 경우에도 아닌 건 아니다/가슴 펴고 살아가라고//다시 한번 예전처럼 말해주세요/누가 뭐라 해도 너답게 살아가라고/너를 망치는 것들과 당당하게 싸워가라고//너는 엄마처럼 아빠처럼 부끄럽지 않게 살으라고/다시 한번 하늘처럼 말해주세요”
 
이 시는, 열심히 일했지만 당신이 살아온 길이 잘못됐다고, 바보처럼 살아온 당신처럼 살지 말고 남들 무시 받지 말고 떵떵거리면서 살라고 말하는 부모님께 보내는 자식의 시이다. 필자 역시 부모님께 이 같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사실 이 세상의 수많은 부모님들이 자식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부모님이 낳아주고 길러 준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날. 오늘 부모님의 가슴 위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고 선물을 드리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넌 나처럼 살지 마라’고 말하는 부모님께 진심을 담은 한 마디가 더 뜻 깊지 않을까. “그래도 저는 당신처럼 살겁니다” ‘당신께서 지나온 삶의 터널이 부끄럽지 않았다고, 이 세상에 수많은 위인 중에서도 당신이 최고’라고 말이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