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튜어트 보이틸라 지음『영화와 신화』
제주를 일러 ‘신들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이 섬에 태어나고 바람 속에서 자라며 예술혼을 담금질해온 예술가들이라면 누구나 제주의 만신전과 그 속에 스미어 있는 신들의 이야기에 심취한다. 그것은 단지 신화 속의 판타스틱한 영웅담을 모사하고 재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흔히 모든 예술의 밑바탕은 문학이라고 한다. 문학의 밑바탕은 다름 아닌 신화다. 모든 예술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작가는 매체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한다. 모든 이야기의 원천은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발명품 신화다. 신화에서 문학과 예술이 탄생했다. 요즘 새롭게 주목받는 스토리텔링기법 또한 신화에 담긴 이야기의 작동원리를 활용한 것이다.
 
굿판과 무대를 전전하는 틈틈이 시나리오작업을 하던 중 인연을 맺게 된 이로부터 “자네는 신화이론을 공부하고 있으니 영화도 낯설지 않을 거야.”라는 말을 들었었다. 제주해군기지 반대운동으로 세 번의 투옥과 70일에 이르는 살인적 단식을 여러 차례 감행했던 영화평론가 양윤모 선생은 그 말에 덧붙여 책 한 권을 내게 선물했다. 그 책이 바로 ‘영화와 신화(을유문화사)’다.
 
헐리웃의 작가이며 대본감수자인 스튜어트 보이틸라의 역작인 이 책은 그의 동료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처럼 신화의 작동원리를 시나리오 창작에 적용한 작법이론서이다. 보이틸라는 저명한 신화학자 조셉 켐벨이 제시한 ‘분리, 입문, 하강, 귀환’이라는 신화의 원리를 토대로 한 편의 시나리오를 열두 개의 틀로 분석하며 새로운 창작방법론을 제시한다.
 
이쯤 되면 이 분야의 전공자가 아닌 바에는 선뜻 눈길을 주기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헐리웃식의 영웅영화가 미국의 패권주의 전략과 잇닿아 있다며 손사래를 칠 수도 있다. 다행이도 지레 그런 걱정을 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의 장점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오락영화와 고전영화를 사례로 들며 친절하게 분석하고 있으며 정치성이 배제된 창작이론이라는 점이다.
 
액션어드벤처, 로맨틱 코미디, SF, 스릴러, 서부영화 등 열 가지 장르의 영화들이 속살을 드러낸다. 다이하드, 미녀와 야수, 터미네이터2, 스타워즈, 나 홀로 집에,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이르기까지 장르별로 다섯 편이 선정되어 있다. 50편의 영화 속 주인공들은 저마다 ‘보통세상’에서 출발해 ‘시련’을 거치고 ‘묘약과의 귀환’에 이르는 열두 개의 관문을 통과한다.
 
이처럼 다양한 장르와 눈에 띄게 다른 스타일의 영화들을 굴비두릅 엮듯이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당연히 신화의 원리다. 신화 속의 영웅이 겪는 여정이 영화에 대입되는 것은 비단 보이틸라 특유의 이론만은 아니다. 조셉 켐벨이 제시한 이론에 힘입어 조지 루카스는 그의 대표작 스타워즈 시리즈를 완성해냈으며 미녀의 야수의 작가로도 유명한 크리스토퍼 보글러 또한 신화이론을 영화에 접목한 바 있다.
 
그러나 보이틸라가 주목받는 이유는 보글러 또한 극찬하듯이 독창적일 정도로 구체적이라는 점이다. 전혀 다른 재료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같은 맛을 내는 음식으로 만들어내는 능숙한 요리사처럼 그가 사례로 들어 분석하는 영화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라면 무릎을 치며 기염을 토하게 될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와 죠스 속에 신화의 원리가 숨겨져 있다니!
 
자칫 짐작과 머릿속의 구름처럼 관념에 머물고 말 신화의 원리를 스크린에 펼쳐내는 보이틸라의 명쾌한 해석과 감상은 다시 한 번 영화의 세기에서 신화를 쫓는 고대로의 시간여행을 단행하게 한다. ‘영화와 신화’를 만나며 신화야말로 인류 최고의 자산이며 문화의 원천이라는 깨닫던 순간 양윤모 선생의 한 마디가 다시금 떠올랐다.
 
“인류역사에서 언젠가 또 다른 미디어예술에 의해 영화는 사라질 거야. 하지만 신화는 영화라는 옷을 벗고 새 옷을 갈아입으며 영원히 살아남을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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