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대학언론, 편견과 도그마 벗어난 순수의 도전영역

▲ 양성철(제이누리 대표이사)

지금의 대학생 세대는 이해하지 못할 시절이 있었다. 군사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이 나라를 틀어쥐고 있을 무렵 사실 언론은 ‘권력의 나팔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국민의 눈과 귀는 멀었고, 진실은 도무지 알아낼 수도 없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진실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고, 그러다보니 자포자기하듯 진실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정권이 친절하게 ‘가이드’한 내용에 맞춰 ‘보도지침’으로 불리는 내용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며 그 시절의 소식은 신문과 TV로 세상에 전파됐다. 실체적 진실과는 딴판인 내용이었다. ‘대중조작’(mass manipulation)이었지만 국민들은 조작된 뉴스에 스스로가 세뇌돼 가고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몰랐다.
 
코미디 같은 현실이지만 지금의 40ㆍ50대가 살았던 대학시절은 그랬다. 오히려 진실은 ‘궁여지책’의 수단에서 알아낼 수 있었다. 민주화를 외치며 거리에서 무차별 살포되던 ‘찌라시’로 불리던 전단에서 진실의 일단을 엿볼 수 있었고, 그릇된 세상이 가야 할 미래의 좌표는 대학 캠퍼스 곳곳의 벽면을 채우던 ‘대자보’를 통해 넘겨짚어 볼 뿐이었다.
 
지금 같은 첨단 인쇄시스템도 아니다. 전단지는 지금의 청년세대가 이해 못 할 등사기로 만들어졌다. 먹지에 롤러로 밀어 배어나오는 잉크가 활자화된 것이 등사 시스템이다. 하지만 인간의 손으로 밀어 만들어진 인쇄물의 깨알 같은 글자는 곳곳에 오류의 흔적을 내보였다. 너무 진하거나, 너무 희미해 곳곳에서 활자가 얼룩으로 뭉개지거나 엉키기 일쑤였고, 어떤 경우는 아예 문단 단위로 글자들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진실을 알고 싶었던 이들은 마치 ‘징후발견적 해독’(symptomatic reading)을 하듯 전단지를 읽어가며 정국의 추이를 살폈다.
 
제도권 언론의 보도만으론 도무지 세상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 짜투리 정보와 대학가 벽면을 채운 ‘대자보’를 챙겨 보며 진실의 문턱으로 다가설 수 있었다.  그래서 그 시절 주간지로 나오던 ‘야담과 실화’는 제도 언론보다 더 강한 전파력을 갖고 있었고, 금지곡으로 정해진 대중가요는 더 큰 확산성과 인기도를 구가했다. 지금의 MP3 파일보다 확산속도는 더뎠지만 그 시절 카세트 테잎으로 복사돼 돌아다닌 금지곡은 물론이고 ‘연금’ 상태의 정치인, 민주화 주창 인사의 녹음된 육성은 진실에 목말랐던 사람들에게 그 시절 ‘구원의 메시지’처럼 더 큰 울림으로 강한 위력을 발휘했다.
 
그 시절 대학언론은 각종 민주단체의 성명서와 대학 내 구성원들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기존 제도권 언론이 다루지 않으니 어찌 보면 뉴스의 사각지대에 놓인 ‘보물’을 대어를 낚듯 건저 올렸고, 어떨 땐 제도권 언론이 기사 아이템을 얻는 ‘보물창고’ 역할도 했다. 물론 제도언론이 그렇듯 대학언론이라고 군사독재 정권의 검열 망을 피해갈 순 없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느슨했다. 확산성이 약했고, 이념과 이데올로기성 주장이 난무했으며, 아카데믹한 이론으로 포장됐기에 따분했다. 그 시절 대학언론은 정권을 사수하려던 측과 정권을 전복하려던 세력 간의 치열한 기싸움에 이념과 이데올로기가 무기로 등장했고, 대학의 언론이란 ‘고품격’ 이미지로 치장하고자 이론이 전개되는 주무대였다. 아카데믹한 이론은 지성의 고뇌를 자극할 진 모르지만 대중에겐 따분한 소리였다. 하품 나오는 소리와 활자만 지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으니 그 이면에 숨겨진 ‘행간’(between the lines)을 파악할 범인(凡人)의 수는 당연히 적었다. 보안과 검열을 강조하는 당국의 눈길이 그 대학언론을 그리 예리하게 살피지 않은 이유다. 국민 대중에 미치는 영향력이 미미했기에 검열의 눈이 그리 샅샅이 훑어볼 까닭도 없었다.
 
우스개처럼 들릴 테지만 그랬기에 한글로 활자화된 대학 학보는 어떨 땐 사실을 알리는 뉴스를 써내려갈 수 없었지만 영문으로 쓰여진 대학내 영자신문이 더 센세이셔널한 기사를 담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캠퍼스 가로등에 매달린 스피커로 흘러 나오던 일회성 대학 방송이 중요한 현장의 소리를 전달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검열의 눈을 가진 자의 수준으로 판단했기에, 국가통제 사회였지만 그런 것 마저 감시·감호할 국가의 물리적 권력의 한계가 있었던 덕(?)이다.
 
지금의 40ㆍ50대가 겪었던 대학시절이다. 진실에 목말랐던 1970ㆍ80년대를 보낸, 지금의 대학생들에겐 부모이거나 삼촌 뻘인 이들이 살았던 시대의 얘기다.
 
이토록 장황하게 그 시절 얘기를 꺼낸 이유가 있다. ‘언론’이란 단어로 포장됐지만 그 시절의 언론 소비자와 언론 생산자 사이엔 목마른 진실이 있었다. 쓰고 싶어도 쓰지 못했고, 알고 싶어도 알지 못하는 그 간극을 채워줄 그 ‘무엇’이 그 시절엔 언제나 필요했다. 그리고 그 간극은, 그 빈자리는 ‘사명감’이 채웠다. 사명감이 없었다면 어느 누구도 진실의 문 근처에 다가설 수 없었다.
 

▲ 제주대신문은 대학 발전, 학내 선거ㆍ논란 사항 등 다양한 기사를 통해 제주대 소식을 알렸다.

진실을 향한 사명감이 채운 갈증

사실 따지고 보면 폭압의 시대는 인류 과거사에서도, 세계 각국의 역사 곳곳에서도 흔적을 남겼다. 나치와 파시즘이 준동하던 전체주의 국가에서 숨 죽이며 뉴스를 접하던 사람들이 과연 없었겠는가? ‘수령’의 권위에 휘둘려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3대 세습체제를 일궈낸 북한 체제에서 그 북한 주민들이 과연 진실을 제대로나 알고 삶을 영위하고 있겠는가? 1·2차 세계대전이란 전란의 광풍이 휘몰아칠 무렵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나라에서 나온 뉴스가 얼마나 진실에 다가섰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동시대를 사는 인류이건만 따지고 보면 자기가 사는 공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결국은 ‘현재의 그늘에 가리워진 인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물 안 개구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모두를 지칭하는 말일 지도 모른다.
 
대학을 지성의 전당이라고 한다. 상아탑이라고도 말한다. 언론을 가리켜 사회의 목탁이라고 한다. 시대가 그랬고, 환경이 그랬고, 격변의 시기에 정의감이 차오르던 사명이 있었기에 그 시절 대학언론은 그나마 그 소명을 다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시절의 대학언론은 불타 오른 정의감도 있었지만 현학(衒學)도 있었다. ‘이데올로기 과잉’이다. 오만과 편견이 자리한 결과다. 지식을 독점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었고, 그 지점에서 그 시절의 대학언론은 사실관계에 대한 진술보다, 진실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던 노력보다 이론을 설파하고자 더 애썼다. 도무지 한국사회에 접목이 어려울 것 같은 외국의 사례와 이론을 쏟아내기에 더 바빴다. 진정한 ‘정치’와 무관한 ‘정치술수’에 더 민감했고, 그래서 더 정치적이었다.
 
지금의 대학언론이 가야할 길은 이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본에 종속된 ‘재벌언론’, 권력에 굴종하는 ‘찬양언론’이란 진술만 하면 그게 끝이 아니다. 거기에서 그치면 부모세대, 삼촌세대가 사로잡혔던 ‘도그마’(dogma)에 갇히는 꼴이 된다. 오만과 편견에 가두어진 신세가 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걷는다.” 문장의 진술로만 놓고 보면 세상을 향한 희생정신과 박애(博愛)의식으로써 우리 삶의 지침이자 좌우명으로 새길만한 말이다. 그러나 아는가? 이는 바로 군사독재정권을 태동시킨 육군사관학교의 교훈이다. 이 지점에서 흔들린다면 그게 젊은 지성이 경계해야 할 오만과 편견이다. 내용이 본뜻은 무시하고, 달을 보라는데 손가락만 쳐다보는 격이다. 모든 걸 진영과 패거리의 문제로 되돌리는 오류의 한 자락이다. 역사적 진실과 진리는 진영과 편의 문제로 해석할 일이 아니라는 소리다.
 

대학언론의 존립이유는 열정과 도전의 발화점

전란 현장을 누비며 종군사진기자로 혁혁히 이름을 알린 헝가리 출신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는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당신이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건 당신이 진실의 현장에 더 가까이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먼 발치에서 지켜본 관찰과 판단의 한계와 오류를 지적한 말이다.
 
상아탑의 언론을 향해 제도권 언론의 요구가 있다. 우리 시대 대학언론이 가야할 길을 묻는다면 눈을 들어 먼 미래를 내다보길 원한다. 무지하기에 용맹하기 보단 차곡차곡 지혜의 샘을 채우기 바란다. 단견과 선입관으로 서둘러 재단하기 보다 지금 사는 시대와 지금 살고 있는 공간이 처한 현실과 문제는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차근차근 살필 것을 권한다. 제주란 공간에 살며 제주의 문제와 이슈, 난관이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조차 관심이 없다면 가야 할 길도 모르는 것이다. 눈을 크게 떴다면 이제 세상에 대한 열린 순수와 도전이 대학언론의 영역에서 활개치는 걸 보고 싶다.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에서 대학의 존립이유는 지식의 사회환원에 있다. 21세기 대학언론의 존립이유는 열정과 도전의 발화점이 돼야 한다는 의무와 사명에 있다. 대학언론에서 용솟음치는 정의는, 진리로 세상을 자유롭게 할 대학 구성원들의 자양분이 될 것이다.
 
우리네 사회의 역사를 짊어질 청년세대의 에너지이자 희망이 샘 솟는 세상의 출발점이 대학언론이라면 중대한 소명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오만과 편견을 거둔 순수의 도전이 대학언론을 메꾼다면 세상의 변화는 시간문제다. 그들이 우리 사회의 중추로 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양성철/ 현 인터넷뉴스 <제이누리> 대표이사·발행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 연세대 대학원 정치학과 졸, 제주대 대학원 관광개발학과 박사수료 ►연세대 교육방송국(YBS) PD·기자, 연세대 동서문제연구원 한국해로연구회(SLOC) 간사, 중앙일보 사회부·전국부·섹션미디어팀·내셔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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