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한국인의 개념 연구

 

▲ 이창익(재일제주인센터장, 일어일문학과 교수)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재일한국인은 통계상, 530,046명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통계밖에 있는 수를 합치면 100만 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들은 다양한 이유와 도일 과정을 거치면서 일본에 거주하게 되었다.
 
제주출신들의 집단 거주지역인 이카이노 등지에서는 한국식 전통문화와 일본문화가 혼재되어 있고, 한국문화 안에는 제주문화와 그 외의 지역문화가 공존하고 있다.
 
일본사회에서 차별을 견뎌내기 위해 많은 재일한국인들이 국적을 숨기며 살아오기 100여년. 현재 재일3, 4세는 정체성의 혼란을 넘어 일본사회에 완전히 동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모국에 대한 개념이 모호해지고 모국어를 구사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문화적 동질성마저 희박해지고 있다. 또한 이념과 시대의 대립으로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지 않고 갈등의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고, 올드커머와 뉴커머로 나뉘어 이질적인 문화와 정체성의 차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재일한국인 사회에 대해 일본인들은 배타적 시각과 긍정적 시각이 각각 존재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도 일본인들이 바라보는 의미와는 조금 다르지만 긍정적ㆍ부정적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
 
이런 시각들은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에서도 나타난다. 호칭 속에 숨어있는 의미에는 시대와 상황 그리고 상대에 따라 달리 부르기도, 또한 달리 해석할 수도 있으며 이 호칭을 통해 바라보는 재일한국인의 개념과도 맞물려 있다.
 
이 연구에서는 재일한국인의 개념을 조명하고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살펴보려 한다. 개념을 조명하기 위해서 먼저, 재일한국인의 도일시기와 과정을 살펴보고 시기 혹은 역사적ㆍ정치적 상황과 관련지어 재일한국인에 대한 용어를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 지난 1963년 1월에 재일본제주도민회가 일본 오사카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한국인의 도일

1. 한일병합 이전의 도일
한국인들이 본격적으로 도일한 것은 1910년 강제로 체결된 한일병합 이후인데, 집단적 이주는 농경문화를 일본으로 전수한 고대 야요이 인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한국에서 일본으로 많은 사람들이 건너가게 되는데 이들이 바로 도래인(渡來人)이다. 또한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온 사람들은 자연스레 일본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는데 이들은 근ㆍ현대에 이주한 사람들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한다. 1876년, 일본과 수호조약이 체결되어 쇄국의 문을 연 조선은 조선통신사 등의 방일을 계기로 소수의 유학생들이 도일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정치적 망명자가 생기면서 근대의 자발적 이주가 시작되었다.
 
2. 한일병합에서 해방까지의 도일
한일병합 이후 도일 시기를 대략 4기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ㆍ제1기 1910~1919년까지 유치기
ㆍ제2기 1920~1930년까지 조절기
ㆍ제3기 1931~1938년까지 억제기
ㆍ제4기 1939~1945년까지 강제 연행기

제1기는 한일병합 이후 일본은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일본인 지주나 친일파 한국인에게 분배하는데 이 때 일반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거나 실업자가 되었다. 이 시기에 발발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일본은 군수산업과 방적산업이 발달하여 값싼 노동력을 확보가 시급했다. 이런 시대 상황이 배경이 되어 본격적인 도일이 시작되었다.

제2기는 제1차 『産米增産計劃』등에 의해 농촌이 몰락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많은 농민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도일하게 되었다. 1923년에는 제주와 오사카를 잇는 정기연락선인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호가 취항하여 많은 제주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오사카 등에 집단 이주를 하게 되었다.
 
제3기는 일본의 군수산업의 중공업화 정책으로 노동자 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가난에 허덕이던 다수의 한국 농민들이 도일하게 되어 재일한국인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제4기는 태평양전쟁으로 인적자원이 시급했던 일본이 강제 연행 등에 의해 대다수가 타의적으로 도일한 시기였다. 1939년에 96만여 명이었던 한국인들이 1945년 5월(추정)은 210만여 명에 이르러 상당수가 강제 연행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3. 해방 이후의 도일
해방이 되자 최대 210만여 명이었던 수가 1946년에는 64만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 4ㆍ3사건과 한국전쟁 등을 전후하여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밀항하여 정착하게 된다. 이들은 단순히 돈벌이 목적으로만 도일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거의 대부분은 70년대 말까지 생계의 수단으로 밀항을 시도하였다.

4. 뉴커머의 도일
80년대, 여행이 자유화되면서 비행기를 이용하여 일본으로 건너오는 사람들이 증가하게 된다. 유학생이 늘어나고 친지방문을 목적으로 불법체류를 하게 되는데, 이들 상당수는 일본에서 정식취업이 되었거나 영주권을 얻게 된다.


'재일한국인'의 개념규정과 호칭, 그리고 의미와 문제점

1. 일본 내의 호칭과 의미 그리고 문제점
 일본에서는 재일한국인을 부를 때, 현재 ‘재일 조선인’의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적으로 병합한 후, 한국과 북한이 건국하기 전까지는 일반적으로 ‘재일조선인’이라 불렀다. 도쿄대의 도노무라 마사루 교수 역시 ‘재일조선인’으로 부르고 이에 대한 개념 규정을 하고 있는데 규정이 일본인의 시각에서 바라 본 것으로, 용어규정에 상당한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왜냐하면  ‘재일 조선인’이라는 용어만을 사용하려 한다면, 해방 이전과 이후로 나눠 그 시대의 국호에 맞게 엄밀한 의미에서 양분되어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 체결과 함께 한국적으로 바꾸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에 걸쳐 ‘재일한국ㆍ조선인’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때부터 국적에 의해 재일조선인 또는 재일 한국인으로 구별되기 시작했다.
 
필자는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우리 동포들을 나타내는 상징적 용어를 ‘재일한국인’으로 호칭하기로 하겠다. 일본에서 흔히 쓰고 있는 ‘재일 조선인’속에는 ‘조선’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두운 이미지와 차별적이 이미지가 있어 적절치 않아 보인다. 필자가 사용하는 ‘재일한국인’은 한반도 전체의 대표가 ‘한국’임을 전제로 하는 개념이다. 그리고 미래의 통일을 대비하는 뜻이 담겨있다. 또한 ‘재일’과 ‘한국인’ 사이에 띄어쓰기를 하지 않고 붙여서 씀으로써 ‘재일한국인’을 하나의 고유명사로 취급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다.
 
대립을 피하기 위해 ‘재일 한국ㆍ조선인’, ‘재일 한국인ㆍ조선인’이 나타나고 있지만 음절 수 등을 고려할 때 부적절한 표현으로 여겨진다. 오히려 이를 한 단어화 한 ‘재일 코리안’ 이 상대적으로 바람직하다고 보여진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재일 한인’이 훨씬 수월하게 사용할 수 있는 대안이라 보여진다. 그 외 ‘죠센진(朝鮮人)’, ‘센징(鮮人)’, ‘반도인(半島人)’, ‘다이상코쿠진’ ‘가이진(外人) 등은 차별어로서 일부 일본인들이 일부러 사용하고 있는데, 부적절한 표현이다.

2. 재일한국인의 개념 규정의 문제점
앞서 도노무라는 ‘재일한국인’에 대한 개념을 규정하였는데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일본국적의 재일한국인 처는 재일한국인인가? 둘째, 귀국 교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셋째, 귀화자도 재일한국인인가?의 문제이다.
 
필자는 첫째, 둘째는 그 범주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문제는 세 번째의 귀화자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재일한국인’의 범주는 문화적 동질성과 정체성 유지 여부이다. 이에 따라 규정되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나가면서

‘재일한국인’의 개념론에 관한 본질적 연구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단 이 개념을 추출하기 위한 자료로서는 도일의 역사와 과정, 호칭, 정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재일한국인’의 개념은 각자의 시각에 따라 다르게 규정할 수 있다. 또한 용어도 각자 다를 수 있다. 큰 틀에서 보면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용어선택과 개념규정을 보다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민족 정체성과 문화적 동질성, 그리고 미래를 간과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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