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정필(사학과 교수)

조선이 세워지고 몇 년 후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당시 고려 수도 개성에 살던 사람들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새 왕조를 따라 한양으로 옮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충의를 앞세운 이들은 조선 왕조를 따라 한양으로 갈 수 없었다. 그들은 귀향하거나 아니면 개성에 그대로 머물러 살았다.
 
개성에 그대로 남은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제한적이었다. ‘사농공상’에서 ‘사’ 즉 과거를 통한 관료의 길과 ‘농’ 즉 농업 방면으로 진출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한양천도 이후 약 70여 년 간 개성에서 과거를 시행하지 않았다. 때문에 그 기간 동안 개성 사람은 과거에 응시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또 개성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형 도시로 내부 면적이 넓지 않았고, 농지가 있는 인근 지역과는 산이 가로 막고 있었다. 때문에 농사로 생활하는 것도 어려웠다. ‘사농’의 길이 여의치 않으니 개성 사람들이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은 ‘공상’ 즉 수공업과 상업이었다. 15세기 중엽 이후 개성인은 두 방면으로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개성인이 생계를 위해 장사를 시작하였지만, 주변 여건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조선 사회의 상업 천시 풍조는 두말할 것도 없고, 좁은 배후 시장도 문제였다. 고려 수도였을 때는 전국의 물산이 개성을 중심으로 유통하였지만, 한양천도 이후 개성은 작은 지방 도시로 축소되었고 당연히 개성을 포함한 그 배후 시장의 규모도 클 수가 없었다. 많은 개성인이 장사에 투신하던 상황에서 개성 인근의 시장 규모는 그들 모두를 수용하기에는 작았다.
 
결국 다수의 개성상인은 고향을 떠나서 전국 각지의 장사가 될 만한 곳을 찾아가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개성상인은 전국 곳곳에 진출하여 장사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 이면에는 개성의 불리한 상업 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초기 개성상인은 내부 갈등도 겪었다. 타지로 장사를 떠나는 사람들은 대개 개성 내에서도 가난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장사 밑천이 없거나 부족하였다. 그래서 개성 내 부유한 사람들한테 자금을 빌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장사 실패 등으로 빌린 돈을 갚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해서 채권자와 채무자 간에 갈등이 발생했던 것이다. 조선전기 개성상인 간 채무 문제는 조정에서도 논의될 정도로 심각했던 것 같다.
 
이처럼 개성상인의 초기 역사를 보면 과연 그들이 상인으로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될 정도로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좋지 않았다. 그런데 100여 년이 지난 조선후기가 되면서 개성상인은 채무 관계로 인한 내부 갈등을 깔끔하게 해결한 것은 물론 조선 팔도는 물론 중국ㆍ일본과의 삼각 무역을 통해 거부를 쌓은 상인을 다수 배출하면서 개성은 서울 다음으로 부자가 많은 도시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개성상인이 조선후기 조선을 대표하는 상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불리한 상업 환경, 내부 갈등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들에게 최적화되고 수준 높은 다양한 상업 관습들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그 상업 관습들은 개성상인이 조선 최고의 상인으로 성장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을 뿐 아니라 일제 강점기 일본 자본의 개성 침투를 저지하여 개성을 조선 대도시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한국인이 상권을 유지한 곳으로 남게 하였다.
 
초창기 개성상인은 차선의 선택을 강요받고 또 불리한 상업 환경에 내부 갈등까지 존재하는 등 악조건에 놓였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조선 최고의 상인으로 성장하였다. 이를 보면서 개인이든 조직이든 누구나 어려운 상황에 처하기 마련인데, 중요한 것은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발전적으로 극복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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