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치완(철학과 교수)

그동안 우리는 동양과 서양의 공간인식을 선(線)과 면(面), 여백(餘白)과 채움, 장방형의 입축(立軸)과 입방형의 횡폭(橫幅) 구도 활용이라는 점으로 대비시켜왔다. 그런데 중국회화의 특징이 (1)세로로 긴 입축, (2)이동시점 투시법, (3)회화의 매달아 거는 기능과 말아 보관하는 기능[捲縮化]에 있다고 한다면, 오늘날 유행하는 웹툰(webtoon)의 세로 스크롤 방식 공간구성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웹툰의 세로 스크롤 방식은 하나의 칸이 세로 길이를 극대화한 것인데, 스크롤바를 내려가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서정적 분위기를 극대화하는 것으로 평가되기 때문이다.
 
펼쳐지지 않은 육지, ‘섬[島]-공간 (SUM[Island]-Space) 

오늘날 우리는 2차원의 평면 위에서 3D를 구현하는 기술의 시대를 거쳐, 4D 기술의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이 아직은 2차원의 평면 위에서 구현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특히 2차원의 평면 위에서 섬[島]은 육지에 일점투시하고 있어서, 경계선이 닫힌 육지와 동떨어진 점(點)으로 표기되거나, 아예 생략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입방형에서 장방형으로 그 틀을 바꾸고, 일점 투시에서 이동투시로 지평을 옮겨가는 획기적인 시도가 필요하다.
 
실제로 ‘섬[島]-공간’은 입방형의 면에서는 하나의 점으로 표시될 수밖에 없지만, 장방형으로 무한히 연장되는 공간 속에서는 아직 말려있어서 펼쳐지지 않았을 뿐 ‘삶의 공간’으로서 두께를 가지고 실재하는 공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틈[사이]과 모호함을 허용하는 가능적 공간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한 단계 더 확장하면 2차원 평면에 재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으로는 선(線)과 면(面)이 아니라 두께를 가지고 말린[捲縮, warp] 공간을 통해 이쪽에서 저쪽으로 단숨에 옮겨 가면서도(tele-port), 연장(延長)되고 확장되는 공간으로서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이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티마이오스』에서 실재세계인 이데아와 그것을 모방한 감각세계 외에 생성의 수용자로서 공간인 ‘코라’가 있음을 인정했다. 플라톤의 ‘코라’는 (1)그것이 비록 가시적인 것은 아니지만 비어 있지는 않고, (2)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최초의 질료’나 ‘어떤 특성들을 지닌 장소’가 아닌 운동의 장소이며, (3) 그 속에서 운동하고 있는 사물들의 구성에 관여(關與)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공간의 의미를 뛰어넘는다는 존재론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같은 관점에서 노자는 하늘과 땅이 생기기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서 모든 것의 어머니인 길(道)이 있음을 주장했다. 존재론적 공간으로서 노자의 길은 그 가운데 생성변화하는 사물이 있지만, 그것은 한결 같아서 모이면 본래적인 것으로 돌아가고 흩어지면 각각의 사물을 담는 그릇이 된다. 플라톤과 노자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공간이 당연히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횡단하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비어-있음(being-empty)’, 곧 ‘없음이 있음’이라는 독특한 존재양상을 가지고 있다.

▲ 세로로 긴 입축, 이동시점 투시법, 회화의 매달아 거는 기능과 말아 보관하는 기능은 오늘날 웹툰(webtoon)의 세로 스크롤 방식 공간구성과 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사진은 고사인물도 중 무이귀도(武夷歸圖, 왼쪽)와 네이버 웹툰 표지.

잘라-깁기: 인식공간의 분할(分割)과 편집(編輯)

공간이 객관적이고 실제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인 인간 없이는 인식될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은 이념상으로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식이 가능하다고 해도 그 대상사물과 인식 주체인 인간이 모두 변화 생성하는 과정에 있으므로, 실제적으로는 플라톤이 말했던 것처럼 ‘이것이 아닌 이와 같은 것’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 표현은 노자에게서도 “길[道]이라고 할 수 있는 길은 변함없는 길[常道]이 아니고, 이름[名] 붙일 수 있는 이름은 변함없는 이름[常名]이 아니다.”라는 선언으로 드러난다. 물론 플라톤의 이데아와 노자의 자연(自然)은 거짓 없는 진실한 세계로서 우리의 제한적인 인식을 뛰어 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한 ‘분할된 공간’이 잘려나가는 당혹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음 순간 본래적 세계가 비어 있지만 그곳에서 끊임없이 생성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우리는 잘려나간 공간이 편집되면서 새롭게 생성되고 있음과 마주하게 된다.
 
곧 플라톤과 노자가 목격한 감각세계의 모순은 그것이 모방물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인식이 현실세계에서 현혹되지 말아야 함을 기억해내는 일종의 미끼가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그것을 모순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올바른 인식이 자리 잡고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덜어-내줌: 실천공간의 해체와 구성

플라톤과 노자의 공간에서는 감각세계에서 우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온갖 것들이 생성된다. 오늘날 우리는 이러한 힘이 작용하는 공간을 ‘힘의 장(field of force)’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해내고 있다. 물론 플라톤과 노자의 공간은 개념적 공간이지만, 실체적인 공간인 ‘힘의 장’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공간을 일깨우기 위해 모색된 개념으로 보아야 한다. 여기에 더하여 오늘날 논의되는 공간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환경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성까지도 포함하고 있을 정도이다.
 
이제 공간은 단순히 그 면에 존재하고 있는 사물들이 자리 잡은 장소라는 개념을 가로질러, 실천적 공간의 구축이 이루어진다는 개념에로 이르고 있다. 이 점은 이미 노자에게서 일정 정도 발견된다. 왜냐하면 노자의 공간은 자신의 존재를 ‘덜어-내줌’으로써 각각의 존재가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있음과 없음이 서로 기대어 있다고 말함으로써 존재론적 공간과 인식론적 공간을 해체시키기 때문이다. 그 결과 노자의 공간인 길은 여기와 저기라는 경계와 좌표를 해체시키면서, 구체적으로 걷는 행위를 통해서 새롭게 구성되는 실천공간이 된다. 이렇게 본다면 공간은 인간의 실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지, 그것이 인간성을 확장시켜주는 공간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포개진 일상의 ‘섬-공간’에 대한 제언

오늘날 사이버 공간은 더 이상 ‘상상의 공간(the imagined space)’이라는 뜻에서가 아니라, ‘사실상-공간’이라는 면에서 ‘가상공간(virtual space)’으로 취급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철학에서 다루어 왔던 공간도 그것이 비록 개념상의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사실상-그러하게-있는 것’을 주의환기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섬[島]-공간(SUM[Island]-Space)’의 실재성도 마찬가지다. 「해양법에 관한 국제연합협약(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Law of the Sea)」에 따르면, 섬은 인간의 삶이 현실적으로 영위될 수 있는 육지지역으로서, 그 공간은 ‘자연적(사실상-그러하게-있는 것)’으로 형성된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공간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존재와 인식의 문제보다도 중요한 것은 실천의 문제이다. 계몽주의적 토대 위에 건립된 모더니즘의 기획이 그 이전보다 더 야만적이면서도 교묘한 권력을 낳았다는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말로 묶을 수 있는 다양한 비판들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섬[島]-공간’에 대해 교차하고 있는 두 시선, 곧 그곳에 거주하면서 삶의 이어가는 사람들과 그곳을 일상성에서 벗어난 낯선 공간으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시선 가운데 어떤 것에 더 주안점을 두어야 할 것인지라는 새로운 문제를 도출해낼 수 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르페브르(H. Lefebvre, 1901~1991)의 사회공간론에서 그 해결 방안의 단서를 찾아볼 수 있다. 곧 공간이 그 속에 있는 것들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것들이 삶의 공간을 구축하는 것이다.
 
‘섬[島]-공간’은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구축하는 것이다. 그 일상은 전통적 삶의 고집이나 그러한 삶과는 동떨어진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주입을 내용으로 하지 않는다. 삶의 공간은 주체와 타자의 시선이 익숙함과 낯설음으로 교차하면서 겹쳐지는 곳으로서, 서로를 해체하면서 동시에 재구성하는 방식으로 실천될 때, 비로소 축제의 공간, 존재(SUM)의 공간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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