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麗末鮮初) 제주의 종이 생산, 가능했을까?

▲ 전영준(사학과 교수)
◇조선전기 종이의 쓰임새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전통 종이는 그 유명세가 대단하다. ‘고려지’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고, 이를 향유했던 송ㆍ명의 식자층은 고려와 조선에 무역물품이나 조공품의 하나로 포함시킬 정도였다. 특히 조선전기에는 역대 왕들의 문치(文治) 정책으로 막대한 양의 종이 생산이 이루어졌고, 이를 위한 관청의 설립과 법제화가 이루어질 정도였다.
 
조선전기 중앙과 지방의 제지수공업 체제 확립은 태종ㆍ세종대의 관찬 사서 및 교훈서 발간과 각 관청의 사무용, 저화 발행, 군수용 등 정부의 크고 작은 일용품은 물론이고, 대명(對明) 외교의 한 방편으로 추진되었다. 건국 초부터 문치(文治)를 표방하였던 역대 국왕들은 그 실천 방법을 경서류ㆍ윤리서ㆍ역사서ㆍ법전류ㆍ의학서 등의 서적 간행과 반포에 두었다. 더욱이 외교 수단으로 활용하였던 대장경 인경 작업 등은 막대한 종이 수요를 가져와 일찍부터 관수용으로 책정되었던 종이의 부족 현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정부는 제지 원료인 막대한 양의 닥나무 확보 노력과 전국 단위의 재배 면적 확대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민간에서 공급할 수 있는 종이 원료는 한계를 보였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1430년(세종 12년) 왜저(倭楮)의 수입 식재와 다양한 원료를 활용한 제지술의 확보로 이어졌다. 특히 세종대에는 지방 수령에게 닥나무 재배 실태와 보호를 위한 별도의 명령이 내려질 정도로 정부의 제지 원료 확보를 위한 노력은 고려시대에 시행했던 방식을 준용하면서도 다방면에서 적극 추진되었다.

▲ 산뽕나무, 닥나무, 꾸지나무의 수종 비교 출처(http://cafe.daum.net/youreden)

◇조선전기 제주지역의 종이 생산 가능성
 
중앙의 종이 생산에 대한 적극적 의지는 지방의 종이 원료 확보와 생산에 주력하게 되고, 제주의 종이 생산도 이와 맞물려 있었다. 조선 전기 제지수공업의 존재와 관련하여 확인되는 여러 기록들 중 제주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많지 않지만, 『경국대전(經國大典)』의 경외공장체제(京外工匠體制)에는 전라도에 속한 제주 지역의 지장(紙匠)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와 더불어 제주에서 생산되었던 닥나무 껍질 진상에 대한 『세종실록(世宗實錄)』의 기록에는 1434년 제주선위별감 윤처공(尹處恭)이 진상한 닥나무 껍질 120근과 이에 대한 세종의 닥나무 보호 명령이다. 즉, 제지수공업의 직접적인 원료인 닥나무 식재 권장은 종이 원료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강력한 의지에 부합한다. 또, 1481년(성종 12년)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 38 「濟州牧」의 <牛島> 항목에는 ‘닥나무가 많다’는 기록이 확인된다는 점으로 볼 때, 제주에도 종이 생산과 관련된 지장이나 제지수공업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판단 배경에는 국초부터 왕실과 관수용 종이 공급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 경주되었던 사실과 연관할 때, 지방 관청의 종이 수요에 대한 중앙 정부의 지속적인 공급이 어려웠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전라도에 속해 있던 제주지역에서 공식적으로 필요로 하는 종이는 자체적인 수급이 이루어졌을 것이고, 이를 위한 닥나무 생산이나 제지수공업 체제도 일정 정도는 유지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배경으로 검토되어야 할 내용이 1300년대 후반 제주 애월의 묘련사에서 대장경 관련 판각이 이루어졌던 사실이다. 경판의 판각 이후에는 그 내용을 확인하기 위한 교정과 교열에 반드시 종이에 인경(印經)한 후 대조하는 작업이 이어지는데, 이때 필요한 종이는 사원에서 생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이는 고려시대에 사원을 중심으로 활발하였던 사원수공업의 전통과 고려후기 제주지역의 사원 분포를 염두에 두고 보면 조선 초기의 제주는 고려의 수공업이 전승되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당시 중앙 정부의 닥나무 재배 권장은 전국적인 단위에서 시행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대한 지방 수령의 닥나무 밭 확보 노력은 이전보다 더욱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후대의 기록이지만 1653년(효종 4년)에 작성된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 ‘과원(果園)’ 항목에는 닥나무 식재에 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즉, 남과원을 비롯한 17개 지역에 3,408주와 우도에 893주를 새로 식재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또, 1694년에서 1696년까지 제주목사로 재임했던 이익태(李益泰)가 작성한 『지영록(知瀛錄)』에서는 제주목에 필요한 서적 간행을 위하여 대량의 종이를 공급하였던 내용이나, 판관 김기홍(金基洪) 선정비에도 재임 중 호적을 작성할 때 종이 값을 지불했다는 기록은 조선전기부터 제주지역에 실재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제지수공업의 존재 가능성을 가늠케 하는 기록으로 볼 수 있겠다.
 

▲ 닥나무 출처(http://cafe.daum.net/youreden)
◇제주의 오름과 『마을지』에 보이는 닥나무
 
그렇다면 현재 제주에는 닥나무가 식생하고 있을까? 현재에도 제주에는 ‘닥나무(楮)’ 또는 ‘종이(紙)’와 관련된 지명이나 표현이 상당히 채집되고 있다. 아울러 전근대시기의 제주에도 관청이나 민수용으로 필요한 종이가 상당량에 이를 것이라는 의문은 현지조사와 문헌조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닥나무가 식생하고 있는 오름은 해발 100m에서 350m까지이며, 현지 주민과의 인터뷰에서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다. 제주의 『마을지』 중 『하효지』에는 생저(生楮)나 면화를 원료로 하여 토지(土紙) 등을 생산하는 가내수공업이 있었고, 지역 내에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황무지를 개간하여 저전(楮田)을 확보하였으며, 이를 원료로 제지나 멍석, 초신, 망태기 등의 재료로 활용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애월읍지』에는 금성리 495번지 부근 일대를 지장터[紙匠址]라 칭하며 1745년 당시 72명이 이 작업에 종사하였고, 대형 석조도구와 목조기구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는 ‘종이물’과 ‘사장청’이 있어서 닥나무 밭[楮田]을 운영하고 관청에 종이를 납품하였다는 기록도 아울러 전한다. 광령 3리에는 ‘셋자종이물’이라는 용천수가 있는데 이 용수도 제지작업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종이 생산에 필요한 용수는 항상 흐르는 상태여야 하므로 제주 지역에서 사시사철 흐르는 하천 주변의 마을에서 제지수공업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 제주도 산뽕나무 잎과 열매 출처( www.jejui.com)

제주지역에 산재하는 오름 중에도 야생으로 분포하는 삼지닥나무가 확인되는데, 저지오름 정상부와 묘산봉, 과오름, 갯거리오름, 제주대학교 주변 등지에서도 닥나무 등의 자생을 확인할 수 있었고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채록할 수 있었다. 오름이 갖는 환경으로만 보더라도 제주지역은 닥나무 식생에 적합한 조건을 갖춘 것으로 보인다. 마을과 마을의 경계에 걸치는 오름의 특성상 여러 『마을지』에서 비슷한 유형의 기록이 확인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닥나무와 관련한 지명중에는 닥피 생산에 꼭 필요한 용수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음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종이 원료의 생산 과정에는 찌고 씻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용수에도 종이와 관련된 방언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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