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16일, 제주를 향하던 세월호가 바다 아래로 가라앉았다. 올해 4월16일에 세상에 없는 그들, 잊히는 그들, 아직 저 깊은 바다 아래 있는 이들을 기억하고 같이 슬퍼하기 위해 수만 명의 시민들이 전국 각지에 모였다. 그리고 이틀 뒤 18일 한 번 더 모였다. 도대체 ‘왜 세월호가 침몰했고, 왜 가라앉는 배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지 않았는지’ 알고 싶고,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보다 ‘살기 좋은 나라, 안전한 나라’를 물려주고 싶은 유가족과 국민들이 모였다. 그 순간 그 현장의 상황에 다녀왔다.  〈편집자 주〉

 

▲ 4월 16일 오후 11시경 종로 1가 YMCA 건물 앞에서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버스 위에 올라가 발언을 하고 있다.

〈S#1. 4월 16일 오후 10시 30분: 종로1가 YMCA앞〉
 
1년 전 바로 이날 물 속에서 떨고 있었던 이들을 기억하고 애도하기 위해 서울광장에 모인 수만 명의 시민들은 국화 한송이 주기 위해 광화문광장 분향소로 발길을 돌렸다. 때는 저녁 9시를 조금 넘은 시각. 서울광장에서 불과 몇 백 미터 떨어진 분향소는 2m 넘는 폴리스 라인으로 막혀 있었다.
 
화가 났다. 사람들은 화냈다. 왜. 도대체 왜 헌화하는 것을 막냐고. 슬퍼할 자유도 없냐고. “비켜라!, 비켜라!” 울분이 터져 나왔다. 유경근 4.16 가족협의회 집행위원장은 “우리는 손에 꽃을 한송이씩 들고 295명의 희생자들과 9명의 실종자들을 만나러 미안한 마음에, 죄송한 마음에 꽃 한송이 바치고자 얼마되지도 않는 이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왜 막습니까”라며 울분을 토했다.
 
결국 행진은 오른쪽으로 청계천을 따라 돌아갔다. 위쪽으로 넘어가는 다리마다 경찰 방패로 막고 있었다. 마침내 넘어갔지만 또 막혀 있었다. 종로1가 YMCA 건물 앞은 경찰의 전조등이 눈부실 정도로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3대의 경찰 버스가 차도를 막고 양쪽 인도는 경찰 병력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대치가 시작됐다. 유가족들과 시민 몇 명이 버스 위로 올라갔다. 마이크를 잡은 유가족은 자신은 평범한 자영업자였다고 소개했다. 자신은 이런 거 할 줄도 모르고 난생처음 해본다고 했다. 그런 지극히 평범한 가족들을 이 지경까지 몰아넣은 정부가 너무 원망스럽다고 말한다. 그들은 단순히 버스 위에 올라간 것이 아니었다. 육체적 한계, 두려움, 슬픔, 분노를 넘어 그 위에 올라선 것이다. 그들은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내려오지 않을 거라고 버릇처럼 말한다.   
 
대치 내내 경찰은 “해산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은 교통을 방해하고 중대한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와 같은 방송으로 해산을 재차 요구했다. 맞다. 시위대는 종로가를 들어서면서 교통을 방해했다. 신호등이 켜졌음에도 불구하고 몇 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경찰은 교통을 방해하지 않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최초로 막았다. 경찰이 불법으로 도로를 점거하게 유도했다.
 
인도에서는 젊은 대학생들이 저지선을 뚫기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경찰은 방패와 캡사이신으로 응수했다. 맨 몸의 시위대는 마스크와 우비에 의지한 채 밀리고 당기는 끝나지 않는 싸움을 했다.

〈S#2. 오후 11시 30분 인사동거리 안국역 사거리 앞〉
 
다시 한 번 돌아갔다. 하루가 넘어가는데 시민들은 지칠 기색이 없었다. 경찰을 따돌리기 위해 그 큰 무리가 달려갔다. 낙원상가를 지나 인사동거리 끝에서 멈췄다.
 
하지만 기다리는건 차벽과 경찰이었다. 좁은 골목사이를 두고 또 대치했다. 아직 힘이 넘치고 슬퍼할 권리를 달라고 외치듯이 다같이 합창했다.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다.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우리는 포기 하지 않는다”
 
결국 헌화하기 위해 모두 흩어져 광화문광장 분향소에서 모이기로 했다. 30분뒤 골목골목을 돌아 건물을 지나 드디어 분향소에 다달았다. 자정이 지난 시각에도 줄은 길게 늘어있었다.
 
헌화가 끝나고 유가족과 일부 대학생이 경복궁 근처에 고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광장 북쪽으로 다시 사람들이 모였다. 넘어가지 못하는 폴리스 라인 앞에서 사람들의 자유발언이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해가 떠오르자 비로소  돌아갔다.
 
눈을 잠깐 부치고 일어나니 유가족들이 화장실도 가지 못하고 경복궁 앞에 고립됐다고 보도됐고 유가족들은 18일 밤까지 경복궁 앞에서 노숙해야 했다.

▲ 4월 18일 오후 5시경 광화문 광장 북쪽에서 유가족 명석 어머니가 맨 앞에서 경찰을 저지하고 있다.
〈S#3. 4월 18일 오후 5시 30분: 광화문광장 세종대왕상〉
 
오후 3시부터 서울광장에서 범국민대회가 진행됐다. 그때부터 경찰은 경복궁에 고립된 유가족에게 가려는 광화문광장 북쪽에 있는 다른 유가족을 둘러쌌다.
 
충돌이 생겼고 유가족과 시민들은 스크럼을 짰다. 도로 건너편 경복궁 앞 버스 위에서 피켓시위를 하던 유가족을 비롯해 항의하는 유가족들을 속속히 연행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이렇게 많은거 처음봤어. 이 많은 경찰을 세월호 침몰할 때 투입하지 그랬어” 유가족 어머니 중 한 분이 울분을 토해내며 소리쳤다.
 
범국민대회가 끝나자 수많은 인파가 광장으로 몰려왔다. 동시에 펜스 주변의 경찰 병력도 늘어났다. 세종대왕상을 두고 충돌이 격해지자 캡사이신으로는 약했는지 살수차가 등장했다. 이 살수차의 접근을 막기 위해 시민들은 차 앞에 눌러앉아 농성을 했지만 경찰의 방패에 밀려났다. 이때 한 시민의 복부를 경찰이 강타했고 이내 쓰러졌다. 그 시민은 신장이식을 받아 지병이 있다고 한다.
 
대치와 충돌을 반복하다 세종문화회관 골목길로 많은 시민들이 합류하고 저지선마저 뚫려 광장 북쪽에 수만명이 다시 모였다.

〈S#4. 18일 오후 9시 30분: 경복궁 앞〉
 
시민들의 저항도 경찰의 진압도 갈수록 격해졌다. 시민들은 경찰 버스를 부시고 흔들었다. 경찰은 살수차 여러 대를 동원해 물대포를 발사하고 캡사이신을 얼굴에 조준발사하고 시민들을 마구 연행해갔다.
 
▲ 4월18일 오후 5시경, 박근혜 정부들어 처음으로 살수차가 등장하는 순간
불행 중 다행으로 정청래 국회의원과 유가족의 중재로 경복궁 앞에 있는 유가족과 시민들이 광화문광장에 합류해 경찰과의 대치가 종료됐다.
 
박수로 경복궁에서 오는 사람들을 맞아주었다. 박래군 세월호대책위 위원, 유경근 집행위원장, 정청래 의원 등의 발언과‘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노래 합창으로 평화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집회가 끝나도 시민들은 집으로가는 발걸음을 때지 못하고 유가족들을 안고 울고 서로를 위로했다.
 
이렇게 3일간의 행동이 마무리됐다.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연행됐고, 유가족 30여명이 연행됐다. 유가족과 시민들은 광장에 경찰과 싸우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다. 정부가 세월호가 왜 침몰했고, 정부가 왜 구조를 안했는지를 제대로 알려달라는 것 뿐이다. 그리고 좀 더 살기좋은 대한민국을 만들자라는 공통된 생각아래 모인 것이다. 지금도 정부는 어떠한 응답에도 답하지 않는다.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유가족과 시민들은 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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