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나 북미에서 말하는 포퓰리즘과 우리나라, 큰 차이 ”“자유민주주의 한계 직시하고 극복하는 길 모색해야”

▲ 진태원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포퓰리즘이라는 말은 시사 문제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여러 번 접해봤을 법한 말이다. 이 말은 2000년대 이후 정치계나 언론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이 용어는 주로 ‘대중영합주의’, ‘대중선동주의’ 같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특히 재정 형편을 고려하지 않은 채 보다 많은 표를 얻기 위한 선심성 공약이나 정책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굳어져가고 있다. ‘표(票)퓰리즘’이라는 언론의 신조어는 이를 집약적으로 표현해 준다.
 
두 번째 특징은 국내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말은 주로 보수적인 정치가들 및 언론에 의해 언급되고 있고, 야당이나 시민사회단체를 공격하기 위한 부정적인 용어법으로 정착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러한 두 가지 특징은 유럽이나 북미 쪽에서 사용되는 포퓰리즘의 용법과는 매우 큰 차이점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포퓰리즘이라는 명칭은 대개 프랑스의 국민전선이나 이탈리아의 북부동맹 또는 오스트리아 자유당 등과 같은 극우파 정당을 지칭하고 비판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극단적 민족주의와 이민자 추방, 외국인에 대한 복지 정책 폐지 등과 같은 극우 정책을 제시하는 정당들이 포퓰리즘 정당으로 비판받는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복지의 확대와 인권의 강화에 대한 요구들이 포퓰리즘으로 지칭되고 비난받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용어법이 아닐 수 없다.


▲ 2008년 광우병 시위 당시 서울 청계광장과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한편으로 1870년대 러시아의 농민들을 계몽하려고 했던 러시아 젊은 혁명가들(나로드니키)의 농촌개혁운동에서 유래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대지주 및 금융재벌에 맞서 소작인이나 자작농의 이익을 옹호하려고 했던 미국 민중당(People’s Party)의 운동에서 유래했다.
 
따라서 포퓰리즘이라는 용어는 처음에는 전혀 부정적인 명칭이 아니었고, 우파나 극우파의 정치 운동을 가리키는 용어도 아니었다. 포퓰리즘 운동의 기원은 기층 민중의 저항 운동이었으며, 이 운동에 참여한 이들, 특히 미국의 민중주의자들은 포퓰리즘을 자랑스러운 명칭으로 생각했다. 또한 1960~70년대 유럽에서는 공산당 중심의 전통적인 좌파와 자본주의 지배 엘리트에 맞서 평범한 사람들의 이익을 옹호하려고 했던 신좌파(New Left) 운동이나 생태운동 같은 진보적 포퓰리즘 운동이 전개되었다.
 
아울러 포퓰리즘의 대륙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많은 포퓰리즘이 나타난 바 있는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2000년대 들어서 베네수엘라의 우고 차베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에콰도르의 라파엘 코레아 같은 좌파 정치가들이 폭넓은 대중들의 지지에 힘입어 기존의 제도권 정당들을 물리치고 정권을 장악하면서 좌파 포퓰리즘의 바람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이처럼 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극우정당들이 포퓰리즘 운동을 통해 정치적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반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민중을 위한 정치를 표방하는 좌파 포퓰리즘 정권들이 잇달아 집권하고 있고, 또한 미국에서는 공화당 지지자들이 주도하는 ‘티파티 운동’ 같은 보수적인 포퓰리즘 운동이 등장하면서, 유럽과 영미 학계에서는 포퓰리즘 연구가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 아르헨티나 출신 역사학자이자 포퓰리즘 이론가에르네스토 라클라우
과거에는 포퓰리즘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병리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곧 포퓰리즘은 부패한 엘리트 지배자들에 맞서 평범한 서민 대중의 이익을 옹호한다는 구실 아래, 자극적이고 감성적인 어법을 동원하여 기성 정치 제도를 공격하면서, 카리스마적인 권위를 지닌 새로운 지도자를 옹립하려는 정치 운동으로 간주되었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던 후안 페론이나 프랑스 국민전선의 장-마리 르펜, 이탈리아의 전(前)수상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등이 이러한 포퓰리즘 정치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현재 서양 학계에서 활발하게 진행되는 포퓰리즘 연구에서는 이처럼 포퓰리즘을 일방적으로 병리적이고 부정적인 현상으로 간주하는 견해는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많은 연구자들은 포퓰리즘과 민주주의의 내재적 연관성에 주목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모델로 간주되었던 자유민주주의 정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곧 영국 사회학자 콜린 크라우치가 <포스트민주주의>에서 지적하듯이 “빈부 격차는 점점 커지는데 세금의 재분배 기능은 줄어들고 있으며, 정치가는 한 줌도 안 되는 기업가들의 관심사에만 주로 반응하고, 기업가의 특수 이익이 공공 정책으로 둔갑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자유민주주의 정체의 위기로 인해 다양한 형태의 포퓰리즘 운동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 많은 학자들의 주장이다.
 
마거릿 캐노번이라는 학자는 포퓰리즘 운동의 근거를 민주주의의 본성 자체에서 찾는다. 곧 민주주의는 “실용성”의 측면과 “구제(redemption)”의 측면을 동시에 갖는다. 대의적인 틀 안에서 전문가들의 미묘한 협상과 타협을 통해 정치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것이 실용성의 측면이라면, 민중의 열망과 의지를 직접 표현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지닌 구제의 측면이다. 아무리 오랜 전통과 잘 정비된 전문적인 체계를 갖춘 민주주의라 하더라도, 적어도 주기적으로는 정치의 영역 안으로 대중의 개입이라는 소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곧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라면 정기적으로 시민들 자신의 손으로 새로운 대표자들을 뽑는 선거를 치러야 한다. 따라서 민주주의가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할 수밖에 없는 한, 시민들의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에 대한 열망으로서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에서 결코 사라질 수 없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포퓰리즘은 자유민주주의의 제도적인 정치가 점차 부패한 과두제 정치로 변모해가는 데 대한 민중 자신의 불만과 저항의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극우 민족주의로 변질될 수도 있고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중민주주의, 곧 몫 없는 이들의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을 정적을 공격하기 위한 수사법으로 남용하기보다는 포퓰리즘이 제기하는 자유민주주의의 한계를 직시하고 극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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