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ㆍ서예 등 예술 덕목뿐만 아닌 다양한 학문에서 큰 빛 발한 ‘석학-어지러운 나라 정세 탓에 제주 유배… 외로움 딛고 교육과 작품활동 집중한 김정희-제자를 향한 사랑이 녹아있는 ‘세한도’… 자신만의 감정과

벌써 백록문학상이 35회째를 맞이해 당선작들이 발표됐다. 학생들의 다양한 문체가 녹아있는 소설과 시들은 뒤처진 것 없이 모두 감동적이었다. 소설과 시부문에서 각각 한 작품씩 수상해야한다는 사실이 야속할 정도였다. 학생들의 문학 작품들을 읽으며 ‘제주도의 유명한 문인(文人)은 누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머리 속에서 빠르게 스쳐간 사람들은 화가 이중섭과 추사 김정희였다. 비록 둘다 제주도 출신은 아니지만 잠시 정착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중섭은 학창시절 문학책에서도 접할 수 있어 학생들에게 매우 친숙한 존재다. 몰론 김정희도 유명무실해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제주에서 많은 작품들을 남겼다는 사실은 생소해 한다. 때문에 당대 최고의 서예가와 그의 작품들을 탐방하기 위해 편집국장이 직접 나섰다. 〈편집자 주〉

▲ 추사 김정희를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추사 김정희’ 그는 누구인가
 
추사 김정희는 1786년 6월 3일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주위 사람들에게 총명했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라는 명문가의 배경을 업고 실력을 키워나갔다. 추사는 시ㆍ금석학ㆍ고증학ㆍ경학ㆍ불교학ㆍ서예ㆍ회화 등 다방면의 학문은 몰론 예술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냈다.
 
추사는 24세에 생원 시험과 34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그 이후, 규장각 대교ㆍ의정부 검상ㆍ예조참의를 거쳐 54세에는 형조참판이라는 대벼슬을 받았다. 하지만 19세기 세도정치의 전쟁 속에 그의 가문은 큰 위기를 맞았다. 1830년, 추사의 아버지가 고금도에 유배되고 그로 부터 10년 뒤 추사는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다. 유배생활은 8년동안 지속됐으며 이 기간동안 추사는 제주도에서 많은 작품들과 제주인의 교육에 힘썼다.

◇추사의 제주살이
 
1840년 10월부터 제주도 대정에서 추사는 유배생활이 시작됐다. 홀로 제주에 내려와 추사는 말로 형용할 수 없을만한 외로움을 겪었다. 날마다 외로움과 싸움을 계속한 추사는 지인들의 편지를 수없이 읽었고 보냈다. 설상가상으로 유배 생활 2년이 지난 1842년에 아내가 죽었다. 일생 최대의 위기를 맞은 추사는 심해진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글을 쓰고 또 썼다.
 
추사의 외로움과 슬픔을 달래는데 있어 토속적인 제주 문화도 큰 기여를 했다. 귤밭의 집이라는 ‘귤중옥’을 당호로 삼을 정도로 제주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촌동네에서 추사같은 높은 벼슬의 인사를 맞이한다는 것은 크나큰 영광이었을 것이다. 특히 대정향교의 유생들에게 큰 가르침을 줬으며 많은 제자들이 그에게 학문을 배웠다. 또한 추사도 제주에 갇혀있었던 8년의 기간동안 수많은 작품들을 남겼다. 다수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추사체’와 ‘세한도’도 이 때 탄생했다.
 

▲ 추사관을 방문한 관광객들에게 해설사가 김정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배지 옆 추사를 기리는 ‘기념관’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755번을 타고 약 50분이 흐른 후 대정읍에 위치한 ‘추사 김정희 기념관’에 도착했다. 기념관은 특이하게 실제 추사가 거주했던 유배지 바로 옆에 설립돼 있었다. 성인 기준 1인당 500원을 지불하면 기념관에 진입할 수 있다. 기념관을 소개하는 팜플렛을 느긋하게 읽고 있는 찰나, 웅성거리는 소리에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소리의 정체는 추사의 작품들을 설명하는 기념관 소속 해설사였다. 기념관을 방문한 관광객들을 위해 연표를 가리키며 상세하게 추사를 소개했다. 관광객들은 그의 설명을 들으며 수긍한다듯이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몇몇 아이들은 추사에 대한 질문공세를 끊임없이 했으나 해설사는 웃으며 정성스럽게 답해줬다.

◇뜻을 알고 보면 더 아름다운 ‘세한도’
 
기념관 내부에는 유배 시절 창조했던 추사의 작품들이 즐비해 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한도’는 기념관 내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비치돼 있다. 세한도를 처음 봤을 때, 단순히 ‘정말 잘 그렸다’라고만 생각했다. 또 국보로 지정돼 있는 일종의 유물이기에 그림의 외관만 보고 감탄했다. 하지만 빙산의 일각만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내 깨달았다. 세한도는 추사의 제자 이상적에게 김정희가 진심으로 마음을 담아 그린 그림이다. 비록 추사가 제주로 유배를 떠나 몸이 멀어진 상태였으나, 제자 이상적은 그에게 귀한 책을 보내며 그를 끔찍이 섬겼다. 이렇게 한 폭의 그림 속에 내재된 의미를 알고 보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추사의 개성을 담은 ‘추사체‘
 
추사체는 말 그대로 김정희의 글씨체다. 추사가 예서의 필법을 연구하면서 추사체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기념관 내에는 추사의 글시체가 녹아있는 서적들과 편지를 볼 수 있다. 마치 컴퓨터로 입력된 글씨처럼 정교했다. 파격적으로 획이 꺽이는 글씨체는 사람들의 호불호를 이끌어 낼 수 있지만 마음을 뒤흔들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선 최고의 명필을 한석봉으로 꼽는다. 하지만 추사체를 본다면 자신이 지금껏 지켜왔던 신념이 잠시나마 무너질 수도 있다.

◇제주를 방문한 반가운 ‘석학’
 
기념관 2층에 올라간 뒤 밖으로 나가면 추사가 실제 살았던 유배지가 눈 앞에 펼쳐진다. 그 당시 시대상을 담은 집에는 추사가 학생들을 교육하는 모습을 모방한 인형이 있다. 실제로 학문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석학’ 추사는 마을 사람들에게 큰 환대를 받았다고 전해진다.
 
추사는 주로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다. 또한 그는 자신의 학업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추사체는 벼루 열 개를 구멍내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어진 후에 창조됐다고 전해진다. 그의 집중력에 감탄하며 여정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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