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지치다면 낯선 곳으로 떠나보라

차가운 빗방울에 벌써 겨울의 한기가 느껴지는 11월, 이제 기말고사만이 남았다. 겨울방학만을 기다리며 지겨운 전공공부를 참아내고 있을 학우들에게 이 곳으로의 여행을 제안한다. 왠지 모르게 우울하고 쓸쓸한, 모든 것을 내팽겨 쳐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은 겨울에 어울릴만한 소설 한 권을 소개한다. 글쓰기에 지쳐 제주도에 내려온 소설 속 주인공은 마치 이 소설의 작가를 연상케 한다. 아무리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지라도 슬럼프는 오기 마련. 올 한해 바쁘게 달려온 당신에게는 휴식이 필요하다. 지금 당장도 좋고 겨울방학도 좋다. 언제든지 어디든지 당신이 원하는 때에 떠나라.

◇줄거리
 
글쓰기에 지쳐 제주도로 내려온 주인공. 그녀는 3층짜리 새 호텔의 307호에 묵는다.  그녀는 그 곳에서 호텔을 망원경으로 관찰하는 말라깽이 소녀의 모습을 발견한다. 말라깽이 소녀는 308호실의 베란다를 바라보며 그런 베란다를 갖기를 원한다. 308호 처녀에게 베란다를 꾸밀 수 있는 싹을 주면서 소녀는 처녀와 친하게 지낸다. 그러던 어느날, 소녀가 갑자기 사라지자 처녀는 불안해한다. 처녀는 주인공에게 사고로 쌍둥이 동생을 잃은 사연을 털어놓는다. 며칠 후 소녀는 돌아온다. 몸이 좋지 않아 서울에 있는 병원에 다녀온 것이었다. 주인공은 다시 자신의 집이 있는 서울로 돌아가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내가 도착한 곳은 성산포다. 마을을 둘러싸고 사면이 바다인 곳에 나는 도착했다.  -책 내용 中 p.15
#케이비이에스 송신소 앞에 있었다. 3층짜리 작은 새 호텔이었다
 -책 내용 中 p.15


◇일출봉 관광호텔
 
버스에서 내리니 일출봉 관광호텔 앞이었다. 이번으로 3번째 여행. 이때까지와는 다르게 쉽게 도착헀다. 소설 속 그대로 KBS 송신소 맞은편에 있는 일출봉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자 프론트에 아주머니 한 분이 TV를 시청하고 계셨다.  용기를 내어 “이 곳이 예전에 신경숙 작가가 묵었다는 호텔이라고 해서 찾아왔는데 혹시 작가가 묵었던 객실을 구경할 수 있을까요?”라고 물으니 “그런 일이 있었나? 예전 일이라면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작가가 94년도 쯤에 이 호텔의 307호실에 묵었다는 사실을 전하자 아주머니는 “그때면 할아버지 있으실 땐가”라며 “이 호텔 새로 지었을 때 오셨구나”라고 말을 이었다. 아주머니는 천천히 둘러보라고 하며 건축 당시 그대로라 바뀐 것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감사인사를 하고 계단 쪽을 향해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신경숙 작가 팬이신가봐요?” 순간 당황했지만 얼른 “네”하며 웃음으로 답변을 무마했다. 3층으로 올라가자 좁은 복도가 나왔다. 310호, 309호, 308호. 307호로 다가갈수록 뭔지 모르는 두근거림이 느껴져 숨을 한번 크게 내쉬었다. 307호실로 들어서자 큰 창에서 햇빛이 들어와 작은 테이블 위를 비췄다. 아직 객실 청소 중이여서 조금 너저분했지만 아담하고 깔끔했다. 이곳에 유명소설가가 묵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느낌이 묘했다. 창문너머 성산일출봉이 거대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이 유명관광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정겨운 시골마을 모습같았다.


▲ 신경숙 작가가 묵었다는 일출봉 관광호텔 307호에서 바라본 성산일출봉의 모습.
 
성산일출봉과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인데 이 곳에는 관광객 한 명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점이 나는 더 좋았다. 관광객 틈에 섞여 있는 것은 굉장히 고역이니 말이다. 성산일출봉에서 눈을 거두고 마을의 집들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보았다. 말라깽이 소녀의 집을 찾기 위해서였다. 분명 호텔 베란다에서 맞은편에 보이는 집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그런 집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소설 속에 나오는 허구적 인물일 뿐인걸까. 마을로 내려와 골목길을 다녀보았지만 소녀의 집은 찾을 수 없었다. 그저 호텔의 베란다를 바라보았던 소녀의 시선을 따라 308호의 베란다를 보며 잠시 말라깽이 소녀가 돼 보았다.
 

#일출봉 쪽으로 걸어갔다. 처녀를 만난 곳은 일출봉 꼭대기에서다.
 -책 내용 中 p.48


◇성산일출봉


▲ 성산일출봉 꼭대기에서 바라보는 아름다운 성산의 풍경
 
역시 성산일출봉에는 사람이 많았다. 계속되던 비가 드디어 그치고 찾아온 맑고 온화한 날씨인 수능날이었기에 고3과 그 부모를 제외하고는 나들이하기에 안성맞춤인 날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어린 자녀들과 흰머리가 희끗한 나이드신 부모님과 함께 찾은 가족단위의 사람들이 성산일출봉을 가득 메웠다.

여러 프렌차이츠 매장이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보고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고민을 했지만 소설 속에서 주인공이 성산일출봉을 올랐기에 나도 그 무리에 섞여 일출봉을 오를 수 밖에 없었다. 좁은 계단을 따라 몇 십분을 올라가자 얼굴에서 땀이 흘렀다. 무리하게 발걸음을 재촉한 탓이다. 성산일출봉에는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하천의 물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고 집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저 멀리로 KBS 송신탑과 일출봉 호텔의 간판이 보였다. 호텔에서 일출봉을 바라보던 나와 일출봉에 올라 호텔을 바라보는 내가 시간차로 자신이 서있는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게 느낌이 이상했다. 일출봉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높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듯 했다. 조금 더 위에서 보는 마을의 풍경은 또 달랐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출봉 정상에서 바라보는 성산은 20년 전과 달라져 있을지 모르겠으나 정상에서 느끼는 감정은 비슷하지 않을까. 일출봉을 오르며 아름다운 성산의 풍경을 바라보며 잡념을 떨쳐 버리고 온전히 자신과 오르는 행위에 대해서만 생각했지 않았을까 싶다. 나도 그랬으니까.

◇깊은 숨을 쉴 때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지치기 마련이다. 그럴땐 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 소설을 쓴 작가처럼 떠나보라. 생각지도 못한 낯선 곳에서 재충전의 의지를 얻거나 자신을 바로 볼 수 있는 시간이 될테니까.  깊은 숨을 내쉬지만 말고 떠나라. 한숨을 내쉴 때마다 당신의 공허한 마음 속에 먼지만 쌓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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