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도 구좌읍에 위치한 행원리 어등포구에 광해군이 이곳을 통해 제주에 들어왔다는 표지석이 있다.

선조의 아들이며 조선 15대 국왕인 광해군은 후세 사람들에게 두 가지 평가를 받는다. 내정 면에서는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나라를 정비하고 서적을 간행하는 데 힘썼고 대동법을 시행했다. 또한 군적 정비를 위한 호패법을 실시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외교적 측면에서도 만주에서 크게 성장한 후금의 존재를 인정하고 중립외교정책을 시행함으로 인해 국제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피했다.

하지만 왕위를 위협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살해했다. 또한 인목대비의 호를 삭탈하고 경운궁에 유폐했다. 이러한 행위는 당시 유교를 숭상하는 조선에 있어서는 패륜으로 여겨졌다. 또한 대국인 명을 배반하고 오랑캐인 후금과 평화 관계를 유지한 것도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던 당시의 사림들에게는 큰 불만이었다. 그래서 광해군은 인조반정 떄 서인에 의해 폐위당하게 된다. 그 후 강화도와 제주도로 유배되어 제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광해, 제주에 유배오다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동일주노선인 701번을 타고 광해군이 제주에 처음 들어온 항구를 찾아갔다.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가 보이고 햇빛이 따스하게 빛나는 가운데 버스는 구좌읍에 있는 풍차마을 행원리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하차 후 바다 방향으로 10여분을 걸었다. 그리고 광해군의 유배생활의 시작지였던 행원리 어등포에 도착했다. 어등포 주변은 그야말로 전형적인 어촌이었다. 비록 옆 마을인 월정리의 발전으로 인해 주변에 몇 개의 카페가 있긴 했지만 포구에는 많은 어선들이 정박해있었다. 또한 해녀들이 물질하는 모습도 쉽게 찾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의 표지석을 볼 수 있었다. 표지석에는 ‘광해 임금의 유배, 첫 기착지’라고 적혀있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유배보낼 때 유배지역을 알리지 못하도록 했을 뿐 아니라 바다를 건널 때는 배의 사방을 모두 가려 밖을 못 보도록 했다고 한다. 또한 당시 광해의 호송을 책임졌던 이원로가 광해에게 제주에 도착한 뒤 제주라는 사실을 알리자 깜짝 놀랐다고 한다. 마중 나온 제주목사가 “임금이 덕을 쌓지 않으면 주중적국(자기편이라도 갑자기 적이 될 수 있음을 이름) 이란 사기의 글을 아시죠?”라 말하니 광해군의 눈에서 눈물이 비오듯 하였다고 한다.

◇광해, 제주에서 생을 마감하다.

어등포를 떠나 다시 버스를 타고 광해군의 적소로 전해져 온 터인 중앙로로 이동했다. 사실 중앙로를 많이 다니지만 이곳이 광해군의 유배지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흔적을 찾아 길을 걷던중 중앙로 KB국민은행 앞에서 초라해 보이는 표지석을 하나 발견했다. 차량 한 대가 비석을 가리고 있었고 비석주변에는 쓰레기가 놓여있었다.

제주에서 5년째 유배중이었던 광해군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관덕정에서 대제가 거행됐고 상이 끝나자 시신은 화북포구를 통해 한양으로 옮겨졌다.

◇광해의 유배생활을 돌아보며

제주에서 5년간의 유배생활을 보냈지만 그의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들은 많이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어등포와 중앙로에서 본 표지석들이 한순간 왕에서 폐위돼 유배생활을 했던 당시 상황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영화 광해에서 광해군은 “백성을 하늘처럼 섬기는 왕, 정녕 그것이 그대가 꿈꾸는 왕이라면 그 꿈 내가 이뤄드리리다’고 말했다. 재위 당시 후금과 명이라는 혼란의 도가니 속에서 명분과 실리라는 선택지에서 실리를 택했다. 그리고  임진왜란에서 고통받았던 조선의 백성을 잠시나마 전쟁의 불구덩이에서 구제했다.  어쩌면 광해군은 조선의 국왕중에서 가장 저평가 받는 안타까운 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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