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배길 중 오라성을 지나서 보이는 최익현의 한라산 유람기를 적은 돌

면암 최익현은 조선 후기의 위정척사 운동가이자 항일운동가이다. 그는 대원군의 실정을 낱낱이 열거해 왕의 친정과 대원군 퇴출을 주장했다. 그리고 그 죄목으로 제주로 유배를 오게 된다. 현재 그의 유배길은 제주관광공사와 제주대학교 스토리텔링 연구개발센터가 2012년 5월 개장했다. 유배길의 코스는 총 5,5km이며 신제주에 위치한 연미마을회관부터 방선문계곡까지이다. 〈편집자 주〉

◇유배길을 걷다

제주대학교에서 502번 버스를 타고 유배길의 시작점인 연미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대원군 퇴출을 주장하다 체포돼 제주로 유배를 오게된 최익현은 조천포구에 도착해 제주목관아지 부근에 있던 아전의 집에서 생활하게 된다. 그곳이 바로 최익현의 유배길이 시작되는 연미마을회관이다. 제주도청에서 내려 유배길의 시작점까지 걸어 연미마을회관에 도착했다.

유배길에 들어서자 봄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오라 올레길과 겹치는 길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왕래는 비교적 많은 편이었다. 5,5km라는 짧지 않은 거리이기에 마음을 다잡고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하늘은 흐렸고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걸을 수 있었다.

길을 걷다보면서 두 가지 특이한 점을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이정표였다. 유배길의 지도를 알려주며, 현재 장소가 어디인지, 얼마나 남았는지 등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줬다.

또 한 가지는 코스중 오라성을 지나면 만날 수 있는 최익현 선생의 흔적을 담은 돌들이었다. 돌은 하나가 아닌 중간중간 마다 하나씩 놓여있었다.

그 중 돌 위에 가지런히 정리된 글들이 가장 인상 깊었다. 돌의 내용에는 ‘하루는 섬사람들과 산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는데, 내가 말하기를 “한라산의 명승은 온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읍지를 보거나 사람들의 말을 들어 보면 구경한 이가 적으니, 갈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가지 않는 것인가?” 하니 그들이 대답하길 “이 산은 4백리에 뻗쳐 있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솟아서”~’라고 적혀있다.

이 당시 상황은 면암이 유배에서 풀려난 1875년 3월의 어느 날이다. 그는 어른 10명 그리고 하인 5,6명을 데리고 꿈에 그리던 한라산 등정길에 나섰다. 돌에 적힌 글들을 읽고 나니 한라산에 대해 등반하기 전 궁금증이 생긴 최익현이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제주에 영향을 주다

면암 최익현이 제주에 유배오기 전에도 제주에는 많은 유배인들이 들려 독서를 즐겨했다. 최익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런 유배인들의 독서활동은 제주도 지식인들에게는 큰 자극제가 됐다. 이러한 계몽의 자극을 통해 제주도 지식인들은 척박한 제주도의 환경에서 교육의 길을 여는 계기를 갖게 됐다.

최익현이 살던 시대에는 당시는 조선의 성리학적 사회 질서가 파괴되어가는 시기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척사위정에 의한 전통 회복과 창의호국할 수 있는 정신적이며 실천적인 교육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최익현의 사상은 척사위정이 바탕일 수밖에 없었으며 자연스럽게 민족 자주권의 회복과 구국항일 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다.

조선말기의 역사적 격변에 앞장서서 부딪쳤던 지식인이자 조선 선비의 마지막 자존심인 면암 최익현 선생, 그의 영향으로 제주의 많은 사람들이 항일운동의 의지를 약속했던 조설대와 그가 한라산을 등정하기 위해 들렀던 방선문 계곡은 그의 애국정신을 되새기고 제주유배 시절의 이야기를 음미하며 유배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떠할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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