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문제를 풀 때마다 문학부분에서 실수가 잦았다. 그래서 여러 공부 방법을 전전했었는데, 그 중 시를 옮겨 적고 그 위에 해설을 적는 방법을 택한 적이 있었다. 고되고 꽤 시간을 잡아먹는 번거로운 방법이었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 시간들은 성적을 올리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무의미했던 건 아니었다. 그 때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날 옮겨 적던 시는 한국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여러 번 보았을 일제강점기의 저항 시였다. 항상 정해진 시간 안에 문제를 풀어야했던 나는 천천히 시를 마주하면서 낯선 감동을 받았다. 시 안에 필요 없는 글자가 없고 한 줄, 한 줄이 써지기까지의 마음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어 먹먹했다.

방 안에서 수능공부 때문에 문제지 속 시를 적으며 찔끔 눈물을 흘리고 있는 내 모습이 이상하고 참 웃겼다. 그러다 내가 왜 시를 읽다가 감동받아 우는 걸 이상하다 느끼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는 충분히 울어도 부끄럽지 않은 가치가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 학생들은 문제지 위에 번호가 매겨져 메마르게 놓인 시들을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읽고 있다. 나도 그랬다. 시를 보고 우는 내 모습을 내가 우습게 여겼던 이유도 이 상황에 길들여져 시를 문제지 속 ‘문제’라고만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수학문제를 보며 우는 것만큼 이상하다고  생각했나보다.

그동안 우리는 시를 시로 보지 못하고 시 안의 감동을 놓치고 있었다. 수능 공부로는 알 수 없는 감동이다. 나뿐만 아니라 내 친구들이 그러하고, 내 동생이 그러하고, 내 오빠도 그래 왔다. 그 날 시를 옮겨 적으면서  그걸 느꼈다. 

학생 때 수많은 시인들의 작품을 접했으면서도 후에 시인의 이름이나 작품명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러니함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것일 테다. 또 방대한 활자들을 수험생활 동안 무감동하게 받아들이고 있으니 여가시간까지 책을 읽으라 하는 권유는 학생들이 질색할 소리가 되었다. 그나마 많은 작품을 접할 학생이란 나이에 글자에 질려버린 상황을 보고 있으니 다른 세대는 어떨지 불 보듯 뻔하다.

지금 우리나라는 모두가 뒤쳐지지않게 오직 앞만 보고 달려야만 하는 상황이다. 매일같이 야근에, 스펙 쌓기에, 취업준비에, 사람들에게는 여유시간이 없다. 느림이 비난받는 세상 속에서 글을 읽고 감동받는 것은 이제 복 받은 소리가 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나마 있는 자투리 시간에도 사람들은 시나 소설보다 조금이라도 실생활에 도움이 될 자기개발서와 외국어교육서, 취업관련 도서를 찾게 된 것이다.

시를 문제지 속에서만 접하게 된 학생들과 너무 바쁜 어른들. 내 주변사람들의 이야기이자 나의 이야기이다. 과연 이런 상황 속에서 한국문학의 위기를 어느 누구의 탓으로 돌릴 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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