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배고픈 세월을 등짐으로 살아온 보릿고개 세대의 사람들은 ‘젊은 시절에 문학도(文學徒) 아닌 사람이 어딨어.’라는 말을 곧잘 했다. 다섯 편의 소설을 심사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젊은 날의 문학, 또는 소설 쓰기는 당장 ‘밥’이 되진 않는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의 ‘볍씨, 밀알’은 될 수 있다. 자신의 초상을 비추는 전신거울이거나. 그런 의미에서 낙선작은 응모자 이름을 숨겼다. 비탄에 잠기지 말라는 응원이다.

<나날>의 틀은 상담사인 그가 질문하고 스물일곱 살의 내담자인 그녀가 응답하는 형식이다. ‘요즘 뭐하며 지내느냐, 걱정거리는 뭔가, 가족관계는 어떤가.’라는 물음표 따라 그녀의 심경을 토로해 나간다. 매질을 일삼던 아버지의 영원한 가출로 편모 손에서 어른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살이에서 타인들과의 이질감, 무기력과 무료함에 빠진다. 인간적 체취를 갈망한다는 복선이 깔려 있다. 내면의 밑바닥을 들춰내는 치열함이 부족했다. 터 파기에서 중단된 신축건물 공사장, 현장사무소 간판이 걸린 컨테이너 같다고나 할까. 소설 제목은, 창업자에게는 대박을 꿈꾸는 상호(商號)이기도 하고.

<내 이름>은 요양병원에 입원한 할머니를 간병하러 떠나는 어머니를 따라 휴가를 내고 제주에 온 내가 요양병원, 고향 마을을 찾는 이야기이다. 치매에 걸린 외할머니는, ‘내 이름’ 대신 출생 달포 만에 죽은 언니 이름인 난희로 호칭한다. 나는 제주를 떠나기에 앞서 꽃씨를 담은 봉투에 ‘홍난희’라고 써서 어머니에게 건네고 공항으로 떠난다. ‘내 이름’과 고향 마을 찾기, 외할머니의 치매 행동에 삼발이 같은 유기적 장치가 없다. 일상적 삶의 단면을 낯설게 하는 암유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냥 모른 척해주면 안 돼?>는 강민준이 오래 전부터 사귀어오던 대학 커플 이연지에게 결별 선언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연지와 K교수의 불륜 소문이 떠도는데다 다달이 섹스를 하기로 한 약속은 물론 손목을 잡는 신체 접촉마저도 거부한다. 변심한 이유로 단정한 이유다. 친구 김해설이 중재자로 나선다. 민준은 K교수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것을 고백하고 연지는 어릴 때 교회에 버린 쌍둥이 누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오해가 풀린 민준이 연지를 찾아가 포옹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막장 드라마의 1회 방영용 각본 줄거리 같다.

<고해성사>의 주인공은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나 매사에 기도하는 게 몸에 뱄다. 기도하는 행위는 보험에 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나의 영웅 같은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신은 죽었다. 신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다.’고 절규한다. 성당을 등지고 있던 내가 고해성사를 하고 신부에게서 ‘불행을 자기 탓’으로 받아들이며 기도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내용이다. 앞의 세 작품을 포함해서, 등장인물은 식물인간이며 구성이 산만하다. 묘사가 아닌 설명으로 일관해서 상상의 자유를 박탈당해 울림이 없다. 공통적 결함이다.

이연희의<나를 위한 동화>는, ‘내가 자동차에 치이는 모습을 목격’한 나무와 선문답 같은 질문이 오가며 ‘나는 죽은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떻게 살아 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에서 출발한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나는, 내가 누구인지 기억해 내기 위해 달을 따라 길을 나선다. 유령의 도시 같은 골목과 공원, 도로를 헤매다가 바닷가에 이른다. 바다에서 자살한 그녀의 ‘무서워 말고 꾹 참고 여행을 하다 보면 모두 알게 된다.’는 목소리를 접한다. 순간 ‘달에 사로잡혔던 별이 마음속으로 들어와 박혔다…별들이 처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의 눈처럼 빛나고 있는’ 것으로 끝난다. 숙련공이 빚은, 어른을 위한 동화다. 좀 도식적이지만 구조가 탄탄하고 간결한 문장이 흡인력을 자극한다. 등장인물의 실체는 없고 목소리만 존재한다. 오아시스를 찾아 사막을 헤매는 식물인간의 의식세계 같은. ‘참’으로 위장한 거짓의 함정일 수도 있겠지만 당선작에 방점을 찍었다.
 

저작권자 © 제주대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