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5학년 때 담임이었던 일본인 교사 후꾸나가의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한 분야를 골라 그 길을 파고 나가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세계최고의 주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갖게 된다.”

◀ 독일 베를린 올림픽 당시 남승용과 손기정 선수(왼쪽부터)

 1936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제11회 올림픽대회가 열렸다. 이날 대회의 마라톤 경기에 출전한 한국의 손기정선수는 1등으로 골인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한민국 청년임에도 불구하고 일장기를 단 채로 단상위에 올라야 했던 손기정선수의 아픔을 우리는 아직도 기억한다.
  그러나 식민지시대의 비애를 겪은 청년은 손기정선수 뿐만이 아니었다. 이 날 대회에서 3등을 차지해 동메달을 목에 건 ‘남승용’선수도 식민지시대의 슬픈 청년이긴 마찬가지였다. 전라남도 순천 출신인 그는 어린시절부터 달리기에 소질을 보였다.
 그가 5살 되던 해, 공부를 빼 먹고 놀기만 하는 그를 보다 못한 아버지가, 그를 30리 떨어진 곳에 사는 작은 아버지 집으로 보내버렸다. 엄한 작은 아버지와 살게 된 것이 두려웠던 그는 작은 아버지가 외출한 틈을 타 담을 넘어 집으로 도망갔고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던 아버지보다 먼저 집에 도착하게 된다.
 마라토너가 되고 싶던 그의 꿈은 보통학교를 다니던 시절, 외사촌과 일본인 교사의 영향으로 깊어진다.
 그는 달리기를 잘 했던 외사촌을 우상으로 삼았고 훌륭한 육상선수가 되려는 꿈을 안고 열심히 연습했다.
 그가 5학년 되던 해 담임이었던 일본인 교사 ‘후꾸나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 한 분야를 골라 그 길을 파고 나가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말을 한다. 이 말에 어린 남승용은 자극을 받게 되어 세계최고의 주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갖게 된다. 그가 보통학교 6학년이 되던 해인 1930년 가을, 그는 서울에서 열리는 ‘제6회 조선신궁체육대회’에 전남대표로 출전한다.
 처음으로 중앙무대에 진출한 그는 마라톤 경주에서 2시간 37분 10초의 기록으로 2위를 차지하는 등 의외의 성과를 올리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후배이자 선의의 경쟁자인 ‘손기정’을 만나게 된다. 양정고보의 후배이면서 동시에 같은 육상선수였던 손기정을 견제했던 그는 1933년 양정고보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그 곳에서 베를린올림픽의 출전티켓을 따기 위한 고된 훈련에 돌입했고 결국 최종선발대회에서 손기정을 제치지 못하고 2등을 차지한다. 하지만 그는 손기정과 함께 나란히 올림픽 출전티켓을 손에 거머쥐게 되었고, 마침내 1936년 8월 9일 결전의 순간을 맞게 된다.
 참가한 56명의 선수들 가운데 49번째로 출발선을 나선 그는 늦은 출발이었지만 절대 긴장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지구력이 강한 그가 흔히 써오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을 믿고 달린 결과 그는 2시간 17분 57초의 기록으로 3위를 하게 되고 비로소 라이벌이었던 손기정과 눈물어린 뜨거운 포옹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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